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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세 Nov 10. 2015

스타벅스야 미안해

세이렌과 나

대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 날, 엄마 친구 딸이자 같은 대학교 선배였던 언니가 미리 학교 구경을 시켜 주겠다며 나를 학교로 불렀다. 당시에만 해도 대학교에 대한 엄청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구두를 신은 대학생 언니들, 학과에 따라 분위기가 다른 건물,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문구가 붙은 대자보까지 모두 멋있어 보였다. 학교 구석구석을 순회하고 나자 어느덧 어두워졌고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후식으로 마신 커피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정확히 말하자면 커피의 맛이 아니라 '스타벅스'를 기억하고 있다. 내 생애 처음 들어가보는 스타벅스였다. 그 초록색 간판이 얼마나 고급스럽고 세련돼 보였던가. 당시의 스타벅스는 '된장녀'들의 마스코트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런 논란이 스타벅스를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 건 사실이다. 


아, 그 당시의 나. 

못 올 데라도 들어온 듯이 스타벅스 문을 열고 쭈뼛쭈뼛 걸어들어간다. 무슨 커피 마시기용 드레스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내 차림새가 부끄러워졌고 온갖 외계어로 범벅된 메뉴를 보는 순간, 수능 볼 때보다 머리가 더 복잡했다. 아아, 아메리카노가 뭔지도 모르던 스무살이었다. 커피도 마시지 못 해서 언니의 도움을 받아 겨우 프라푸치노 어쩌구를 마셨던 것 같다. 그 얼음의 사각거림과 신세계같은 달콤함. 그런 고급스러운 음료를 아무렇지 않게 마시는 대학생 언니들의 무심함이 멋있었다. 

'밥 한 끼 가격에 육박하는 음료지만 후식으론 꼭 먹어줘야만 하지. 안 그럼 참을 수 없어.' 그런 사치스러움이랄까. 

대체 커피 몇 잔을 마셔야 저렇게 우아하고 세련될 수 있을까. 프라푸치노를 쪽쪽 마시면서, 나중에 테이크 아웃 커피 한 잔을 들고 강의실로 향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 했다. 그땐 커피 한 잔으로도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대학에 들어와보니 누구나 커피를 즐겼다. 커피를 좋아하는 것이 대단한 취향 같았고, 또 커피를 못 마신다는 것이 촌스러워 보일까봐 처음에는 일부러 마셨다. 한약처럼 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1학년 때는 시럽을 왕창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셨고, 점차 시럽이 줄고 나름의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4학년이 되자 시럽 넣은 아메리카노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학교라는 곳은 커피를 못 마시던 애송이를 진한 커피를 즐기는 여자로 둔갑시키는 곳이 아닐까. 아무리 생각해도 국문과에서 배운 지식은 잘 떠오르지 않기에 커피 취향을 얻을 걸로 만족하자, 그러고 싶다. 

 

내 내장이 커피물에 물들어간 만큼 스타벅스도 많이 변했다. 예전엔 사치의 상지이었다면 지금은 우리 동네까지 들어선 커피 프랜차이즈일 뿐, 아무도 스타벅스를 마신다고 된장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요새는 제 집 드나들 듯이 스타벅스로 출근하고 있다. 지금은 세련된 사람들의 핫플레이스라기 보다는 동네 아줌마들의 집합소가 된 모양이다. 카페 안이 미용실 혹인 복덕방처럼 소란스러워질 때는, 조용히 커피를 즐길 나의 권리와 카페에 아이를 데려와 여가 시간을 즐길 아줌마들의 권리를 저울에 매달아 본다. 카페에서 작업하는 내가 문제인가 카페에서 수다를 떠는 그들의 문제인가. 어느 것이 맞고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이기적으로 생각할 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조차 커피 한 잔의 매력이기는 하다. 


아무튼, 스타벅스는 대중화 되었지만 내 주머니 사정은 대학교 때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빈털터리 주제에 취향은 생겨서 맛없는 커피나 분위기 나쁜 카페는 꺼리는 최악의 상황이 된 것이다. 어찌됐건 매일 작업을 해야하기 때문에 어디든 카페는 필요하다. 나에게는 커피값이 '사무실 월세'나 다름 없는 것이다. 하루에 5천원을 잡아도 15만원... 젠장, 우리 할머니가 들으면 노발대발 하시겠다. 

누군가에게는 껌값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가격이다. 게다가 끼니나 생필품도 아니고 기호식품이라니. 하지만 나같은 1인 자영업자에게 카페는 꼭 필요한 공간인 것이다. 카페를 이용하되 어떻게든 커피값을 줄일 수는 없을까.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멍하게 스타벅스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망측한 생각도 든다. 남자 지점장과 사귀게 된다면 매일 커피 한 잔 쯤은 그냥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가끔 새로 나온 음료도 마실 수 있고, 매일 아이스 라떼에 시럽을 추가할 수 있을지도 몰라. 저 커다란 보온 텀블러라면 하루 종일 먹고도 남겠다... 그러나 커피에 비친 내 모습은 가난하고 초췌한 여자 사람. 미용에는 더 큰 돈이 필요하다. 나는 요즘 미용은 거의 포기했다. 하하.


최대한 커피값을 줄일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의 남자친구는 꿀팁을 알고 있었다. 녀석이 가난한 취준생이던 시절, 자소서 쓰러 카페는 가야겠고 커피 마실 돈은 없어서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에 처박혀 있던 스타벅스 텀블러를 발견한 것이다. 거기에 물을 채워 스타벅스에 간 후, 음료를 주문한 고객처럼 테이블에 앉아 하루 종일 작업을 하는 것이다. 가방 검사 하듯이 텀블러를 뒤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이 녀석의 꼼수를 눈치채지 못한다. 직원들은 바쁘고, 다른 손님들은 자기 친구와 떠드느라 바쁘다. 이 녀석은 스타벅스 왕국에서 은밀하게 혼자만 다른 음료를 마시면서 자신의 재치에 우쭐했을 것이다. 마치 비싼 자유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야 하는 놀이동산에 몰래 잠입한 사람처럼 승리에 도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멋지게 취직해서 매일 스타벅스를 마셔주마, 그런 오기로 신나게 자소서를 썼을지도 모른다.


좋은 생각이다. 역시 공대생이야. 나는 그렇게 대꾸해주었다. 

뭔가 대기업을 상대로 은밀한 복수를 하는 것 같은 그런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어두컴컴하고 밀폐된 텀블러 속에 그런 기발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니!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이 방법을 쓰기엔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시고 싶다. 커피를 좋아하기도 하고 장시간 작업을 하려면 카페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대한 다른 방법을 궁리한다. 텀블러를 가져가면 300원 할인이 되고, 스타벅스 카드를 충전해서 사용하면 가끔 원플러스원 쿠폰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가끔 새로나온 메뉴가 마셔보고 싶긴 하지만 되도록 가장 저렴한 뜨신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아주 가끔,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달달한 음료를 나에게 허락하는 정도다. 또 오랜 시간 작업을 하려면 내가 배고픔에 굴복하지 않도록 적당한 간식을 먹워줘야하는데, 나는 여기에만은 돈을 쓰기가 아깝다. 거의 달달한 디저트류라 먹고 나면 속이 쓰리고 헛배부른 느낌에 불쾌해지기 때문이다. 스타벅스 디저트는 누군가와 수다떨며 먹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요새 스타벅스로 출근할 때 집에 있는 간식거리들을 최대한 챙겨 나온다. 바나나, 식빵, 과자, 고구마 그런 것들이다. 처음에는 옆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도둑처럼 몰래몰래 먹었는데 지금은 뻔뻔하게 먹는다. 배고파서 작업 접고 일찍 귀가하는 것보다 잠깐 쪽팔린 게 낫다, 그렇게 위로 하면서.


가끔 내가 스타벅스에게 미안해지기는 한다. 커피 한잔으로 카페를 이용할 수 있는 적정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평균보다는 조금 오래 있는 것 같고 가끔은 안 시킬 때도 있고, 또 외부 음식을 먹으니까. 하지만 나 매일 와서 조금이라도 너에게 보탬을 주고 있으니까 모르는 척 봐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문화에 투자하는 거라고 생각해줘. 가끔 비싼 음료들도 시켜 먹을테니까. 


아무튼 지금 이 스타벅스에는 벌써 크리스마스 노래가 흐른다. 크리스마스를 타깃으로 한 새로운 메뉴가 어벤저스처럼 늘어서 있다. 이런 식으로 스타벅스는 어떻게든 내 주머니를 털려고 갖은 궁리를 하는 것 같지만, 나는 어떻게든 주머니를 뺏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두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여기 직원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진상으로 낙인 찍혀 별명 하나 붙여줄 때가 오면, 나는 다른 스타벅스로 옮기면 된다. 자고로 기생의 삶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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