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세 Feb 24. 2017

나를 배반한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적한 바닷마을에서 벌어지는 작은 이야기를 예상했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고통을 이겨나가는 그 정도의 이야기가 나의 취향이므로.


요즘 들어 깨닫는 거지만, 좋은 작품들은 나를 배반한다. 

내 예상을 70 퍼센트쯤 따라주면서 내가 마음껏 거만하게 비행기를 타도록 내버려두다가

20도 정도 방향을 틀어 나를 당황시켜놓고

마지막 10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격차로 나의 뒤통수를 후려친 뒤,

박수 칠 기력조차 없이 혼절한 나를 흔들어 깨워서 기어이 항복의 깃발을 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두 시간 동안 몰입도가 대단한 스릴만점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기진맥진해버리고 만다. 

그 날 하루는 더 이상 다른 작품을 볼 수 없을 만큼 감정이 꽉 차 버리고 

다음날까지 여운이 남아 일상생활이 흐릿해지기도 한다. 작품에 둘러 싸이는 기분. 

정말 좋은 작품은 치매에 걸린 후에도 기억나는 거라고 하지 않는가. 


<맨체스터>도 오늘 나를 배반했다. 

나는 '리'의 과거는 예상했지만 그가 고통을 벗어날 거라고 예상했다.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우리는 누구나 상처가 있지만 인생은 계속되고 산 사람은 살아야죠'라는 식의

진부하지만 안심이 되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메시지를 전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은 따뜻해질지 몰라도 영화가 끝난 후에 밀려드는 현실감은 책임지지 않는 그런 영화들처럼.

어쩌면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건,

주인공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는 영화 속 인물일 뿐이고 작품이 만들어 놓은 시작과 끝 안에서 

결국 자기만의 해결책을 찾아가도록 고안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봤자 그는 영화가 끝날 때 어떻게든 고통을 끝내게 된다.

성장하거나 변화하면서 긍정적으로 끝날 수도 있고 복수나 죽음으로 결판이 날 수도 있다. 

어떤 결말이 됐든 끝이 있는 주인공과는 달리 

우리의 끝은 너무나 멀리 있어서 우리의 고통은 영원할 것만 같다. 

나는 그런 지점을 <맨체스터>가 위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기의 상처를 어쩌지 못하는 '리'를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나는 '리'가 '패트릭'과도 친해지고, 맨체스터로 이사 와서 친구도 만들고 여자도 만나면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상처를 치유하고 인생의 다음 챕터를 살기를 바랐다.

그게 보통 영화들의 작법이었고, 이야기의 주인공이란 그래야 했으니까. 

근데 '리'는 끝까지 아픔에서 허우적 거렸고 '패트릭'을 책임지지 못했고 다시 잡역부로 돌아갔다. 

설마 이게 끝이야?라고 생각하는 순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고 나는 너무 화가 났다. 

이렇게 인물을 절망적으로 만들어 놓고 아무 변화도 없이 무책임하게 버려두는 것은 가혹하지 않은가?

'리'에게 조금은 희망과 변화를 주어야 하지 않는가?


아마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답답함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저 정도 했으면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만 좀 아파하고 저 여자랑 말도 섞고, 사람들이랑 좀 어울리고 그러지."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건데 이제 와서 뭐 어떡할 건데. 왜 노력을 안 해?"

그도 그럴 것이 두 시간 내내 '리'는 답답할 정도로 슬픔에 잠식돼 있다. 

정말 나까지 꿀꿀해질 것 같으니까 그만 좀 꿀꿀해했으면... 싶을 만큼.




그런데 그런 생각들,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영화를 다시 되새겨 보니까 '리'에게 가혹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 만족을 위해서 주인공에게 억지로 '치유'를 강요한 것은 아닐까.

주인공이 고통을 극복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야 내 마음이 편하고 뭔가 교훈을 얻은 것 같으니까 말이다.

이런 교과서식 감상, 정말 역겹다. 그런데 무의식 중에 내가 하고 있었다니.

돌이켜 생각하니 '리'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나는 '리'의 상처가 결코 치유되지 못할 거란 걸 짐작할 수 있다. (감히 '알겠다'고는 못 하겠다.)

가족을 잃는 고통을 타인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며 힘내라고 충고할 수 있는가.

'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닥치고 '리'가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슬픔을 장려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힘내"라거나, "그 정도면 됐어" 같은 위로를 할 때,

진짜 그 사람을 위한 것인지, 나 자신의 위안을 위한 것인지 서늘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왜 슬픔은 극복해야 하는가?

어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일부분이 된다. 

어떤 상처들이 피부에 영원히 남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슬픔이 상처의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함부로 평가하지 말고 함부로 위로하지 말고

그저 기다려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의 슬픔을 지겹게 여기는 나의 매정함을 항상 경계하면서.


어쨌든 <맨체스터 바이 더 씨>가 좋은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영화 자체가 주인공을 사랑하고 있다. 

영화가 관객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고 주인공만 애틋하게 사랑하는 영화는 또 처음인데

그게 그렇게 따듯하고 오래 간다. 

그래서 실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리'. 

응원한다. 










덧.

그래도 슬퍼하는 사람을 내버려 두는 건 못 할 짓이라는 분들에게.


'카타르시스 스토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상대방이 언제나 자신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또 자신 앞에서만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신만이 타인에게 전적으로 신뢰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 믿음을 재확인할 수 있는 상황을 계속 만든다고 한다. 고통받는 사람을 위로하면서 자기애를 강화하는 유형의 사람.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진짜 위로인지 아니면 나르시시즘인지 따져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을 접하고 엄청나게 찔려서 얼굴이 화끈댔던 나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책이 제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