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보통 나를 위한 계란 후라이가 하나 남아 있다.
새벽에 할머니가 프라이 두 개를 만들고, 그중 하나를 먼저 출근하는 동생이 먹고 나면
약간 굳어가는 후라이 하나가 내 몫이 되는 것이다.
아침이라 입맛은 없지만 배고픈 건 싫으니까 버릇처럼 먹어왔다.
그런데 얼마 전 나를 위한 후라이가 없기에 내가 직접 만들게 되었다.
세상에서 계란 후라이보다 쉬운 것이 어디 있을까.
아무리 요리에 관심이 없는 나라도 계란 후라이 정도는.
그렇게 무심코 프라이팬을 달구고 계란을 깨뜨렸는데
완성작은 할머니가 늘 식탁에 올려주던 후라이와 사뭇 달랐다.
울긋불긋 갈색으로 굳어져서 플라스틱 계란 후라이 같은 느낌이 된 것이다.
후라이 특유의 부드러운 식감이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질긴 후라이를 거의 찢어 먹으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다음번엔 동생이 후라이를 만들어 달라고 해서 동생 것까지 만들 게 되었다.
나는 반숙이 더 좋은데 동생은 꼭 완숙이어야 해서 그냥 불 위에 오래 두면 되겠거니 했다.
그런데, 흰자 부분을 태우지 않으면서 노른자를 완전히 익이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다.
나는 또다시 딱딱한 갈색의 후라이를 만들고야 말았다.
내가 기름에 인색한 편이어서 인지 내가 만든 후라이는 마르고 인공적이고
플라스틱 같은 느낌까지 풍기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흰자 부분은 부드럽고 하얗게 유지하면서도 노른자를 완전히 익힐 수 있었던 걸까.
왠지 오기가 생긴다.
그 후로도 몇 차례 후라이에 도전했다.
터득한 것은 기름을 충분히 둘러야 한다는 것, 예열부터 약한 불로 해야 한다는 것,
후라이는 생각보다 빨리 되는 음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흰자를 탱탱하게 유지하면서 완숙을 만들려면 은근히 섬세한 감각이 필요하다.
빨리 먹고 싶어서 조급해하다간 플라스틱 후라이를 먹게 된다.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후라이와 싸우고 있다.
내가 그동안 요리 분야에 대해 게으른 탓도 있지만
세상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다.
애정을 가지고 대하지 않으면 애정 없는 결과물이 돌아온다.
왜 나는 세상 대부분의 것에 '무심코'인가.
그러면서 나에게만 일이 못 되게 돌아간다고 불평인가.
세상에는 계란 후라이를 '배를 채워야 하는 섭취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요리하는 과정을 즐기면서 완벽히 내가 좋아하는 상태로 만들어 먹으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서 미묘한 취향이 생겨나고 인생의 행복도가 올라간다.
무심코 스쳐가는 인생의 비밀들,
조금 더 천천히 인내하면서 애정을 주어야 하는 것들이 사방에 널려있다.
인생이 복잡할 때
그런 사소하고 쓸데없어 보이는 것에 애정을 주며 주의를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팁 같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