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이란 시간

Project Bluebird

by 해솔


17년 정도가 걸렸다. 2008년 중학생 시절 타인과 사회라는 구조에 처음 관심을 가진 이후 막연했던 문제의식이 하나의 방향으로 정리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처음에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불합리해 보이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질문이 조금씩 바뀌었다. 사람은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왜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가. 왜 삶은 외부의 충격보다 내부의 판단에서 더 크게 흔들리는가. 이 질문들이 쌓이면서 문제의 중심이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보의 부족이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하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1+1과 같은 사칙연산처럼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미 많은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비슷한 결정을 내린다. 손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안전을 택하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물러선다. 결국, 문제는 무지가 아니라 판단이 이루어지는 구조 자체였다.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은 절대적 기준의 붕괴를 이야기해왔다. 니체는 이를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종교 비판이 아니라 인간이 의지하던 초월적 의미 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대에 들어섰다는 진단이었다. 더 이상 확실한 의미가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은 방향을 잃기 쉽다. 이 개념이 바로 니힐리즘(Nihilism)이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인간은 허무에 빠지거나 기존의 가치에 무기력하게 매달리게 된다. 니체는 이 같은 자들을 '더없이 추악한 자'들이라 비판했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졌다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미가 사라진 자리에서 새로운 기준을 창조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 허무주의'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상 속 의사결정에서도 반복된다.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어떤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와 같은 문제는 정답이 주어져 있지 않다. 경제학자 러스 로버츠는 이런 문제를 답이 없는 문제들(wild problem)이라고 불렀다. 계산과 분석으로 해결할 수 있는 tame problem과 달리 wild problem은 선택 이후의 삶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사전에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즉, 이직이나 결혼과 같이 정답이 없는 문제들은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며 그 상황을 직접 경험해 보기 전에 상상하고 예측하는 것과 실제로 그 상황을 경험한 후의 삶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초에 예측하려는 행동이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답이 없는 문제들에서는 선택 자체가 곧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결국 삶은 대부분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어떤 기준으로 살 것인지 정하는 과정에 가깝다.




불안이 판단을 흔드는 방식



그런데 불안은 이 wild problem을 tame problem처럼 다루게 만든다. 존재의 방향을 결정해야 할 문제를 단기 손익 계산의 문제로 축소한다.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할 조건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오류처럼 취급한다. 이 과정에서 사고의 흐름이 왜곡될 수 있다. 위험은 실제보다 크게 보이고 손실은 과장되며 잠재적 가능성은 과소평가된다. 의사결정은 점점 방어적으로 변한다. 장기적 성장보다 단기적 안전이 반복적으로 선택된다. 이런 선택이 누적되면 삶의 궤적은 조금씩 좁아진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인간이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그 의미에 대해 침묵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긴장을 부조리(The Absurd)라고 불렀다. 부조리는 세상이 이상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대와 세계의 무관심이 충돌할 때 생긴다. 그는 이 상태를 없애려 하지 말고 직면해야 한다고 말했다. 초월적 의미를 통해 문제를 덮어버리는 태도를 그는 철학적 자살이라고 비판했다. 부조리를 인정한 채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안은 제거해야 할 감정이라기보다 세계의 침묵을 마주했을 때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긴장에 가깝다. 문제는 그 불안이 사고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때 발생한다. 불안이 인지에 개입하면 위험 회피 성향이 강화되고 손실을 과도하게 두려워하게 되며 불확실성을 과장해서 해석하게 된다. 결국 의사결정은 방어적으로 굳어진다. 이 흐름은 과도한 불안이 인지 왜곡을 일으키고 그 왜곡이 의사결정을 바꾸며, 반복된 선택이 삶의 방향을 서서히 바꾸는 구조로 이어진다. 이 구조가 무서운 이유는 한 번의 큰 사건이 아니라 잦은 회피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선택의 폭이 줄고 삶의 기대치가 낮아지게 되며 결국에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기준까지 바뀌게 된다.




왜 사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


의사결정이 흔들리는 이유가 불안만은 아니다. 불안이 판단을 왜곡시키는 경우가 있다면 애초에 판단의 기준이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 채 살아간다. 무엇을 했을 때 행복한지 어떤 상태에서 삶이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지,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선명한 언어를 갖지 못한 채 주어진 경로를 따라간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데 어딘가 공허하고 딱히 큰 불행이 없는데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력감이 쌓인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삶이 ‘내가 사는 삶’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삶’처럼 느껴진다.


모두가 매일 아침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삶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오히려 그런 기대가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다만 최소한 한 가지는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당신은 왜 사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적어도 한 가지 대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다. 그 대답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문장처럼 분명한 것도 좋지만 '가족을 지키고 싶다', '어떤 분야에서 실력을 쌓고 싶다',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을 내가 선택했다는 감각을 잃고 싶지 않다' 같은 문장으로도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준 답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답이어야 한다.


이 대답을 갖지 못하면 삶은 쉽게 순응으로 흘러간다. 순응은 나쁜 태도라기보다 방향이 비어 있을 때 자연스럽게 나오는 상태다. 문제는 그 순응이 오래 지속될수록 선택이 사라진다는 점이다. 선택이 사라지면 책임도 사라지고 책임이 사라지면 삶의 감각도 사라진다. 사람은 결국 스스로 선택했다는 감각이 있을 때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감각이 약해지면 무력감이 커지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가 계속 침잠하는 상태가 된다. 여기서 다시 불안이 커지고 불안은 또 의사결정을 왜곡시키며, 왜곡된 선택은 다시 삶의 감각을 더 약하게 만든다. 불안과 공허는 서로를 강화한다.


니체가 말한 니힐리즘을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이런 상태에 가깝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겠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그래서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서도 어느 순간부터는 삶이 텅 비어 있다고 느끼는 상태다. 니체가 강조한 것은 이 허무를 단순히 견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카뮈 역시 세계가 대신 대답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태도로 살아갈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둘의 결론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겹친다. 삶의 의미는 외부에서 자동으로 주어지지 않으니 최소한의 기준을 스스로 구성해야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시지프가 끝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았을 때 그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태도였다. 카뮈는 돌을 밀어야 하는 현실을 의식하는 순간 시지프가 자신의 운명보다 강해진다고 보았다. 니체 역시 고통과 무의미를 제거하기보다 그것을 인정하면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는 인간을 긍정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불안을 없애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것도 아니다. 불안이 판단을 망가뜨리는 지점을 인식하고 삶을 버티게 하는 최소한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




더 나은 세상은 완벽하게 안정된 상태가 아니다. 절대적 의미가 알아서 주어지는 상태도 아니다. 오히려 불확실성과 무의미를 인정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기준을 세우고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가깝다. 감정이 존재하되 감정이 판단을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계가 침묵한다고 해서 삶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며 그 침묵 속에서도 자신이 어떤 이유로 살아갈 것인지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삶은 훨씬 단단해진다.


불안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으며 불안 자체가 내 문제의식인 것도 아니다. 세계는 여전히 침묵하고 정답은 주어지지 않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불안이 사고에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선택의 방식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왜 사는지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을 스스로 구성할 수 있다면 삶은 쉽게 침잠하지 않는다.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개인을 단순히 위로하는 일이 아니다. 세계의 침묵과 인간의 불안이 만나는 지점에서 판단 구조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이해하고 그 구조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게 만들며 각자가 최소한의 삶의 기준을 세울 수 있도록 돕는 방향을 모색하려 한다. 절대적 기준이 사라진 시대에 흔들림을 줄이는 일은 외부 조건을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인식 구조를 정교하게 다듬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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