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위로'라는 주제가 나왔다.
이야기는 누군가 위로라고 건넨 말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 적이 있냐는 물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위로라는 단어 자체가 워낙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보니 색색깔의 경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위로라는 말로 포장된 '동정'을 느껴 상처 받았던 기억부터 위로가 '공감'이 되어 다가온 순간까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로'의 힘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오는구나 싶었다. 수건 돌리기 하듯이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데 곧 내 차례가 되었고, 난 갑자기 좀 멍해진 기분이 들어 머뭇거렸다.
내게 '위로'라는 말은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했고, 정확히는 내가 '위로'를 필요로 한 순간을 찾기 어렵다고 느껴서 당황했던 것이다. 위로가 공감을, 또 공감이 위로를 필요로 하듯 둘은 이어져 있는데 그럼 나는 공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인가? 그건 말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난, 그렇게 극도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럼 난 왜 위로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이런 물음을 시작으로, 난 당시에 카페에서 솔직하게 꺼내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글로나마 남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항상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행위를 통해 나도 '덤으로' 위로받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방에게 해주었고, 내가 필요한 말을 상대방에게 들려줬다. 내 입 밖으로 나와 상대방을 향한 위로는 곧 내 귀에도 들렸으니까. 아마 난 아주 오랫동안 그런 위로의 방식을 자연스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주변에 슬픈 얼굴, 슬픈 마음은 언제나 넘쳐났고, 내가 필요한 위로는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에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그런 방식을 택했고, 그게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음적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보다 가족과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였다. 서로 위하는 마음이 너무 커 작은 일에도 마음 아파하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난 쉽게 울 수 없었다. 그들이 공감해줄 내 아픔은 그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되어 내게 더 무겁게 돌아올 테니까. 가족 외에도 난 내 감정의 웅덩이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제삼자 입장에서 건네는 '위로를 통한 위로'는 보다 이성적일 수 있어 한결 편안했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지 느꼈다. 내가 얼마나 위로받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공감받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 쳤는지, 뭐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감췄는지. 어쩌면 난 그냥 위로도, 공감도 무서웠던 것 같다. 내가 그 위로에 너무 의지할까 봐, 또 그래서 무너져 버릴까 봐. 정말 완벽주의에 고립된 사람은 본인이 무엇에 집착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정말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위로가 필요한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변할 수 있다고, 더 솔직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두 번, 드러내는 솔직한 마음이 내게 더 큰 용기를 가져다줄 수 있길 바라본다.
p.s 이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결정적 이유인 아빠에게 감사를 표한다. 오늘 저녁 아빠가 내 편을 들어주자마자 내가 왈칵 울어버려 모두를 당황시켰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