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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수 Nov 15. 2021

위로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오늘 카페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위로'라는 주제가 나왔다. 

이야기는 누군가 위로라고 건넨 말이 상처가 되어 돌아온 적이 있냐는 물음으로 시작되었는데, 위로라는 단어 자체가 워낙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보니 색색깔의 경험들을 들을 수 있었다. 


위로라는 말로 포장된 '동정'을 느껴 상처 받았던 기억부터 위로가 '공감'이 되어 다가온 순간까지, 사람들은 생각보다 '위로'의 힘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오는구나 싶었다. 수건 돌리기 하듯이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데 곧 내 차례가 되었고, 난 갑자기 좀 멍해진 기분이 들어 머뭇거렸다. 


내게 '위로'라는 말은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했고, 정확히는 내가 '위로'를 필요로 한 순간을 찾기 어렵다고 느껴서 당황했던 것이다. 위로가 공감을, 또 공감이 위로를 필요로 하듯 둘은 이어져 있는데 그럼 나는 공감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인가? 그건 말이 안 된다. 적어도 내가 아는 난, 그렇게 극도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럼 난 왜 위로에 대해 생각하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이런 물음을 시작으로, 난 당시에 카페에서 솔직하게 꺼내지 못했던 내 이야기를 글로나마 남겨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난 항상 내가 누군가를 위로해주는 행위를 통해 나도 '덤으로' 위로받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상대방에게 해주었고, 내가 필요한 말을 상대방에게 들려줬다. 내 입 밖으로 나와 상대방을 향한 위로는 곧 내 귀에도 들렸으니까. 아마 난 아주 오랫동안 그런 위로의 방식을 자연스럽다고 느꼈던 것 같다. 주변에 슬픈 얼굴, 슬픈 마음은 언제나 넘쳐났고, 내가 필요한 위로는 그들에게 건네는 위로에서 충족시킬 수 있었다.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들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는 게 아니다. 그저 내가 그런 방식을 택했고, 그게 나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마음적 여유가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보다 가족과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였다. 서로 위하는 마음이 너무 커 작은 일에도 마음 아파하는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난 쉽게 울 수 없었다. 그들이 공감해줄 내 아픔은 그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는 사실이 되어 내게 더 무겁게 돌아올 테니까. 가족 외에도 난 내 감정의 웅덩이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고 싶지도 않았고, 제삼자 입장에서 건네는 '위로를 통한 위로'는 보다 이성적일 수 있어 한결 편안했다. 


그런데 문득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 지 느꼈다. 내가 얼마나 위로받지 않으려 노력했는지, 공감받지 않아도 된다고 손사래 쳤는지, 뭐든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감췄는지. 어쩌면 난 그냥 위로도, 공감도 무서웠던 것 같다. 내가 그 위로에 너무 의지할까 봐, 또 그래서 무너져 버릴까 봐. 정말 완벽주의에 고립된 사람은 본인이 무엇에 집착하는지도 모르는 것처럼, 정말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위로가 필요한지 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변할 수 있다고, 더 솔직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래도 이렇게 한 번, 두 번, 드러내는 솔직한 마음이 내게 더 큰 용기를 가져다줄 수 있길 바라본다.


p.s 이 마음을 털어놓게 된 결정적 이유인 아빠에게 감사를 표한다. 오늘 저녁 아빠가 내 편을 들어주자마자 내가 왈칵 울어버려 모두를 당황시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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