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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넘는다는 것

      

되도록 멀리 하려 하는 사람      


다짜고짜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는 사람

내 동의 없이 반말을 사용하는 사람     


나는 남의 개인사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래서  다짜고짜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는 사람들을 만나면 굉장히 힘들고 지친다. 관심이 없으니 개인사를 듣는 행위가 나에게는 고강도의 감정 노동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개인사를 늘어놓는 건 어디까지나 습관이나 개취지 딱히 선을 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사람의 개인사를 듣게 됨으로써 어찌 되었든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인정해달라는 눈빛을 보내거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내 입장에선 무슨 말이든 해줘야 할 것 같긴 한데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말하는 것들이 잔소리가 될지 조언이 될지 쓰레기가 될지 정말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입 다물고 있으면 자기가 한 말을 듣고 있냐고 반문하거나, 사람이 말하는데 참 태도가 별로라는 말을 나중에라도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면 나 역시 불쾌해진다.   


최악은 친분을 명분으로 쓰레기처럼 쌓아놓은 감정을 타인에게 쏟아내는 사람이다. 본인은 후련하겠지만 당하는 사람은 길을 가다 오물을 뒤집어쓴 느낌이다. 게다가 아무리 씻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 오래된 오물. 그래서 나는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특급 비밀이랍시고 자신, 가족, 남편, 친구 이야기를  풀어놓는 사람과는 되도록 만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give and take 개념도 분명해서 나도 하나 깠으니 너도 하나 까라며 눈빛으로 요구한다. 비밀은 나눠가져야 지킬 수 있으니까)


또 하나는 내가 동의하지 않았는데 나이, 성별, 경험 유무 등등 여러 되도 않는 이유로 말을 놓는 사람이다. 대화할 때 나는 상대가 선택하는 단어를 통해 그 사람의  표현력을 유추하고, 구사하는 문장을 통해 그 사람의 생각을 추리하며, 말투를 통해 그 사람의 감정을 유추한다.(잠깐 삼천포로 빠져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단어는 ‘거시기’다. 거시기는 명사가 될 수고, 동사가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감정이 될 수도 있다. 거시기의 스팩트럼은 너무나 넓은 까닭에, 거시기를 내 마음대로 오역을 하다 호되게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대화중에 거시기란 말이 나오면 굉장히 긴장된다. 그런데 더 힘든 건 거시기가 무엇인지 물어보면 그 거시기를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거시기가 나온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모든 대화의 기본값은 나이에 상관없이, 성별에 상관없이 존댓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은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몇 번 봐서 친하다는 이유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내가 아직 동의하지 않았는데 알아서 말을 놓는 사람들이 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그 작은 호감마저 뚝 떨어진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가.


상대가 동의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는 반말은 굉장히 불쾌하다. 사실 반말이 불쾌한 것보다 반말을 함으로써 딸려오는 수많은 단어들 때문이라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반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의 이름 대신 너(보통은 ‘니’)를 쓰게 되고, 그러다 보면 거름망을 거치지 않은 말들이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툭툭 튀어나오게 된다. 솔직히 친하고, 편하단 이유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둘 사이의 관계에서 지분을 많이 차지하고 있거나 유리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사용할 수 있는 핑계지 결코 상호적이거나 수평적인 명분이 아니다.      



타인에게 잘하기 위해, 또는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는 건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식의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시간 말고는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와 많은 시간을 공유하기엔 내 시간은 정해져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선택해야 하고 선택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선을 만들어 놓게 된다.  

선이란 건 너무나 주관적이고 편협적이라 지키는 것도, 지켜주는 것도 어렵지만 그래도 나만의 선을 만들어 놓으면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필요 없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쓸데없이 애를 쓰지 않아도 된다.


분명한 건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은 싫어할 수 있지만, 내가 싫어하는 건 남들도 싫어한다는 점이다. 좋은 인간관계를 도모하고자 누구에게든 잘해주려 노력하는 대신 상대방이 그려 놓은 선을 넘지 않는 행동이 존재감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비호감이 되는 건 막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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