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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기를 요구받은 자, 숨기를 거부하다

지금의 나는 무엇의 결과물일까


지금의  모습이나 처지가 과거에서부터 쌓아온 결과물이라고 정의한다면 나는 부끄러워서 숨어야  것이 분명하다. 온전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탓에 ()에게 기생하고 있으며, 우울증으로 치료를 기록을 가지고 있어 티브이에서 우울증 환자의 범죄 소식을 들으면 괜히 위축된다. 어릴  성추행을 당한 기억은  잘못이 아님에도  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무덤까지 가져갈 비밀이 되었다.

아무렇지 않게  버텼다가도 문득문득 지울  없는 나의 불행한 과거가  버겁게 느껴지는 날엔 그대로 사라지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고 싶다. 숨는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하나도 없다는  알면서도 피하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나를 지배한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피하고 싶다는 욕망과 피하는  비겁한 행동이라는  안의 검열 사이에서.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없지만 아직 나는 숨지 않았다.  말을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친구들 덕분에 숨지 않을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습은 못난 과거의 결과물이 아니라  못난 과거를 잊기 위해 버티고 애쓴 노력의 결과물이다.

 숨지 않은 11명의 여자들 


<나는 숨지 않는다>(한겨레 출판, 박희정, 유해정, 이호연 지음) 차별의 가장 끝에 놓여 있는 11명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각각 이혼, 장애, 홈리스, 탈북, 탈가정, 조현병, 학교 성폭력 등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서늘해진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여성이다.

사회적 낙인과 여성이라는 이중 차별 속에서  여성들은 무엇을 선택할  있을까. 아마 선택권이랄  있기는 할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11명의 여성들은 삶을 두고 남을 탓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탓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많이 배우지도, 성공의 길을 걸어보지도 않은 속칭 말하는 인생의 실패자 또는 소수자들로 구분되지만  누구보다 다수/정상/성공의 그늘에 가려진 차별의 진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무엇이 문제인지 지적한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순간부터 각자도생을 생존 원칙으로 삼을 것을 요구했다.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있다고 속삭였고, 가난한 것은 부지런하지 못한 당신 탓이라고 비난했다. 남들을 밟고 성공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인정했고, 착한 것은 무능한 것이라고 비웃었다. 능력에 따른 차별은 당연한 것이고 차별당하기 싫으면 성공하면 되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길거리에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젊었을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장애인이 되는 이유는  부모가 몸을 함부로 굴렸기 때문이거나 타고난 팔자가 더러워서 그런 거라고 낄낄거렸다.

사회적 소수자는 소수란 이유로 다수에 의해 끊임없이 평가당하고, 그렇게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 시대의 요구에 반하는 것들은 모두 혐오의 대상로 취급받으며  최대한 눈에 띄지 않기를 요구받아왔다. 혐오가 제거의 대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은 대개  과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는 이들을 가두거나 격리시키는  숨기는  집중했다. 중세 시대 구빈원이 그렇고, 지금의 정신병원이 그렇고, 장애인 시설, 요양 시설이 그렇다. 사회 구성원의 안전과 행복을 명분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시설을 만들고 소수자들을 모두 한 곳에 밀어 넣는다. 그렇게 차별의 이유는  처벌의 근거가 되고, 입체적 개인은 비정상이란 이름으로 납작해지고 만다. 가장 좋은 시설이란  소수자들이 쉽게 나올  없는 멀고  곳이다. 그래야 나의 안전을 보장받을  있으니까.

 비정상적인 사람들은 숨는  미덕이자 의무다. 눈에 띄지 않아 최대한 혐오를 유발하지 않는 것이 이들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일이자 도리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서 장애인은 되도록 집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고,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범죄를 저지를  있기 때문에 타인과 어울려서는 안 된다. 성폭력이 벌어졌을  절반의 책임은 여자에게 있는 것이기에 부끄러움을 알고 얌전히 자숙해야 하며, 자기 몸이 비정상이라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사회적 손실을 줄여주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래서  얼마나 정상이니?

숨기는 것이 정말 답일까, 이게 정말 최선일까? 묻고  묻는다. 무엇의 답이고 누구를 위한 최선인가. 다수는 누구이고 소수는 누가 결정하는가. 분명한  소수는 스스로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로지 결정될 뿐이다. 그러나 소수를 결정하고 이들을 부정하는 것보다  나쁜  이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  세상에 존재하는 않는 것으로 여기는 .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침묵을 요구하는 . 이런 방식으로 수많은 장애인,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 이혼 여성, 홈리스, 탈가정 여성들은 점점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다.

 책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세상에 나와 다수에 저항하며 자신의 존재함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한다.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상관없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스킵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욕을 먹고 싸우며 상처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여기까지 오는  얼마나 힘들었을지 다수의 끄트머리에 있는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내가   있는 일이란 그저 이들에게  살아내라고, 져도 좋으니 다만 사라지지 말라고, 제발 숨지 말라고, 가슴으로 응원하는 일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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