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병, <엄마의 마지막 말들>
한 시간에 한 대 다니는 시골 시내버스 정류장 앞을 지나면 장에 가는 할머니들을 보게 되는데 계절이 바뀔 때쯤엔 그 매일 봤던 할머니들이 계절이 한 두 명씩 사라진다.
작년 가을 이장님 댁 맞은편에 살았던 명자 할머니가 사라졌고, 그해 겨울에는 곱등이 할머니가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전엔 방울이를 기르던 할머니가 사라졌다.
괜한 오지랖이 발동해 궁금도 하고 걱정도 되었는데 나중에야 그 할머니들이 모두 요양원으로 갔다는 말을 돌아 돌아 전해 듣는다. 어디로 가셨는지 물어보면 야반도주도 아니고 자식들이 흔적도 없이 데리고 가서 모른다는 말과 함께.
혹시나 돌아가신 줄 알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다행이다 싶다가도 요양원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아는 터라 그 할머니들이 요양원에 가서 반송장처럼 누워 있을 걸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몸이 불편해서 그렇지 불편한 대로 끼니도 스스로 해 드시고 자식한테 민폐 안 끼치겠다고 상추니 고추니 따다 팔아 약값이라도 대신다고 하셨는데 도대체 어디가 안 좋으셔서 그렇게 급하게 요양원으로 모셔가셨나.
언제 다시 돌아오시려나 싶다가도 한번 들어간 요양원은 죽어서나 나온다는 곳이라는 걸 모르지 않기에 괜히 마음이 씁쓸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식이 돼서 무슨 납치하듯이 동네 사람도 모르게 모셔가나 싶어 괘씸한 생각도 들고, 오죽하면 집도 키우던 개도 굶어 죽게 그냥 두고 요양원에 맡겼을까 싶은 딱한 생각도 든다.
죽음을 앞둔 부모를 돌본다는 건 어떻게 상상해도 역부족이다. 나는 의학적 지식도 없거니와 지식을 안다고 한들 그것을 실천할 용기도 돈도 없다. 게다가 나 역시 짊어져야 할 생계와 가족이 있다 보니 내가 그 상황에 닥친다 한들 모든 것들 졎혀두고 부모의 죽음을 옆에서 함께 맞이하겠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 뻔하다.
나도 보통의 다른 사람처럼 단 얼마라도 저렴한, 그렇지만 괜찮은 시설의 요양원을 알아볼 것이고, 내 부모를 잘 봐달라는 명분으로 담당 요양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수시로 들여다볼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반드시 임종은 옆에서 지켜볼 것이라는 야무진 다짐도 할 것이다. 사실 턱도 없는 상상이나 마찬가지지만.
박희병(선생님)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은 죽음을 앞둔 구십 노모를 환갑이 넘은 아들이 간호하면서 ‘엄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1년 동안 어머니가 했던 말들을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책이다.
환갑이 넘은 글쓴이의 입에서 나온 ‘엄마’란 단어가 어색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치환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아련함이 느껴진다. 어머니가 아니라 엄마라는 호칭. 나이와 사회적 지위, 체면을 모두 환원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
‘엄마’는 말기 암과 인지장애를 판정받고 죽음을 앞둔 상태였다. 마지막 돌봄을 두고서 몇 개의 선택지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편안한 죽음을 맞길 바라는 마음으로 요양원 대신 호스피스 병원을 선택한다. 그러나 한 병원에 오래 있을 수 없는 의료 시스템 때문에 일정 기간이 되면 전원을 해야 하는 불편함, 완화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담당 의사와의 의견 충돌, 그리고 죽음을 일상화해야 하는 호스피스 병동의 생활을 견디는 일은 병마로 고통받는 환자나, 환갑이 넘은 보호자 모두에게 결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요양원을 선택하지 않은 건 아들의 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고, 외로운 곳에 어머니를 홀로 둘 수 없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환자를 사물화 하는 의료 시스템에 생때같은 ‘엄마’를 밀어 넣을 수는 없다는 의지는 어떤 선택이든 가장 중요한 전제이자 조건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각 글 앞에서 쓰여 있는, 길어봐야 두 문장에 불과한 엄마의 말들에는 그간의 생에 대해 고달픔과 안타까움이, 자식에 대한 걱정과 사랑이, 가족을 두고 먼저 떠나야 하는 서러움과 걱정이 담담하게 담겨 있다. 특히 누워서도 수시로 아들에게 묻는 “밥은 묵나?”, “요새 많이 말랐다. 밥은 묵나?”, “밥 묵고 가라.”는 별것 없는 말에는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와 몸의 상태에 따라 매일 다르게 느껴진다. 밥을 먹는 건 생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밥을 먹지 않는 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기에 어머니의 ‘밥 묵나’라는 질문은 아들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어쩌면 어머니의 마음과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 있는 말이라 괜히 가슴이 아프다.
부모의 죽음을 앞두고 자식이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모든 의학의 힘을 끊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도록 해드리는 것, 아니면 모든 의료의 힘을 동반해서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해 드리는 것. 둘 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이 선택이 쉽지 않은 건 환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자든 자식이든 알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환자의 생명은 보호자의 판단에 따라 달려 있기 때문이다. 생의 존엄성은 자신이 선택했을 때 빛나는 것이기에 보호자가 어떤 선택을 한다 한들 환자 당사자의 마음을 온전히 헤아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선택이란 그저 산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뿐이다.
예전에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는 병원에 있던 환자들도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지금은 집에서 병원으로, 요양원으로 그리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서가 되었다. 특히나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은 죽음을 고칠 수 있는 질병의 하나로 이해하려는 태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커지면서 병원에 대한 의존도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 게다가 노환도 고칠 수 있는 질병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지면서 누구든 죽음을 늦추기 위해 첨단 의학, 신약 개발에 기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고, 경제적으로 여유만 있다면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의사와 병원을 찾아다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이가 들고 앓고 있는 질병이 하나둘씩 늘어나면 어쩔 수 없이 장기간의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물론 병세가 좋아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병원이 안전하고 편하다고 해도, 내 집으로 돌아가 편히 눕고 싶다. 혹 그럴 수 없는 상환에 놓이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주변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갖고 싶지만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는 순간 어떤 선택권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남은 생을 요양원이나 요양 병원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건 멀고 먼 남의 일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내가 경험해야 하는 일부가 되었다. 게다가 코로나 19 팬더믹 이후로는 요양원에 모신 부모의 임종을 지키는 것도 이제는 어렵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종식된다고 해도 이러한 분위기는 유감스럽지만, 이전으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요양원 측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24시간 대기를 하고는 있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늘 나의 간절함보다 한 발 앞선다.
요즘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연적인 죽음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죽음이 인생에서 더 멀어지게 되고 그러니 죽음이 더 두려워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태어난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인데도 너무나 분명한 진실이지만 외면할 수 있다면 가능한 외면하고 싶다.
탄생의 신비는 배워도 죽음의 신비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탄생의 두려움은 얼마든지 희망으로 바꿀 수 있지만 죽음의 두려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죽음은 그 자체로 두려운 것보다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서, 죽음 그다음을 몰라서 두렵다.
그 마음을 잘 아는 글쓴이의 아내는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빛 이야기를 들려주며 불안해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죽음으로 가는 길, 그다음을 몰라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엄마’ 앞에서 이렇게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울다가 보내는 일도, 남의 손의 맡겨 놓고 생계를 이유로 부모의 고통을 잊고 있다 죄책감에 가슴을 쥐어뜯는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꼭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