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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 이야기나 하는 관계에 대하여

      

살다 보면 친하지 않거나, 친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야 할 때가 있다. 모른 척 하기엔 얼굴을 알아 머쓱하고, 그렇다고 아는 척 하기엔 정서적 공통분모가 하나도 없는 관계들. 예를 들면 아이와 관련해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학부모들, 업무와 관련해서 언제일지 알 수 없는 식사 약속만 남발하는 관계자들. 

이런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하는 가장 만만한 방법은 아마도 날씨 이야기일 것이다. 대개 “아침부터 푹푹 찌네요.”, “공기가 찬 걸 보니 계절이 바뀌려나 봐요.”와 같은 말로 대화의 물꼬를 튼다. 이 말에 대꾸를 해주는 사람은 그나마 나쁘지 않은 관계일 가능성이 높지만, 짧게 “네”라는 대답으로 서둘러 대화를 종료하려는 사람 또는 “지금 뭐라고 씨부렸냐?”와 같은 표정을 하는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날씨 얘기조차도 아까운 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날씨 얘기를 주고받는 건 정말로 날씨가 궁금해서, 날씨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다만 날씨 얘기를 시작으로 해서 두 사람 사이에 더 많은, 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물꼬가 될 수 있다. 날씨 이야기를 하다 보면 옷차림 이야기를 하게 되고, 옷차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취향, 성격 등등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과정을 통과하고 나면 앞으로 이 사람과의 관계를 확장시켜 나갈지, 딱 이만큼만 유지할지, 아니면 과감히 손절할지 대충 견적이 나온다. 그래서 날씨 얘기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실마리다.      




가끔 사람들과의 이야기 끝에 남편의 존재를 웬만해서는 드러내지  않는 나에게 그 집 부부는 평소에 무슨 얘기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별거 있나요. 날씨 얘기나 하죠.”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 내심 당황해한다. 부부 사이에 날씨 얘기나 하는 관계라니. 내가 없는 곳에 가서 당장 우리 집 사정을 듣고 싶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다. '어쩌다 당신네 부부는 날씨나 이야기하는 관계가 되었나?'      

부부 사이에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막상 본격적으로 마주 앉아 서로의 일상과 앞으로의 계획, 고민 등을 이야기한 게 언제인지 생각이 안 날 때가 종종 있다. 출근하기 바쁜 오전, 먹고 쉬기 바쁜 저녁, 주말엔 아이와 함께 외출하거나 각자 밀린 취미 활동을 한 다음에야 겨우 서로의 얼굴을 진지하게 마주 보게 될 시간이 생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에 서로 얼굴 뜯어보며 깊은 대화를 하는 것도 아니다. 짧지 않은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살다 보면 그럴 여유도, 그럴 마음도 딱히 생기지 않을 때가 많다. 게다가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원하지 않는 대화는 길게 유지할 수도, 질 높은 대화도 되지 못한다. 적지 않은 부부가 대화를 간절히 갈구하는 경우는 대개 반복되는 갈등과 그로 인한 다툼이 계속되어 견디기 힘들 때다. 

사실 부부 사이의 대화 주제만큼이나 소소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없다. 밥 이야기, 아이들 이야기, 상사 뒷담화, 건강, 취미, 생각보다 대화의 무게는 가볍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화 시작에는 예열이 필요 없다. 그러나 생계, 미래에 대한 걱정,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 부양해야 하는 부모 문제, 배우자의 신뢰 없는 행동 등은 예열이 충분히 필요한 주제들이다. 이런 무겁고 진지한 대화를 다짜고짜 시작하는 건 상대방에 입장에서 보면 마른하늘에 날벼락일 수도 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들려오는 배우자의 걱정과 근심은 폭탄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갑분싸 “할 말이 있어. 우리 얘기 좀 해.”도 별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죄가 없는 사람도 스스로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 “내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 앞에는 사전 밑밥이 필요하다. 



대화의 시작은 자연스러워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이 없어야 하며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주제로 시작해야 한다. 한 사람만 말하고, 한 사람은 들어야 하는 대화는 날씨 얘기나 하는 관계보다도 못한 관계다. 날씨 얘기로 대화를 시작했을 때 기꺼이 호응해주는 관계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대화도 씨알이 먹히는 곳에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씨알이 먹히는지 안 먹히는지 알아보는 방법 중에 하나로 날씨 이야기를 써 보라. 나의 대화에 대한 상대방의 표정과 태도는 앞으로의 그 사람과 나의 관계 설정에 중요한 조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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