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함에 대하여

-나는 키오스크가 세상 어렵더라.

사진: <아주경제> 참조


나는 스마트폰 사용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디지털 취약계층에 속한다. 키오스크가 없는 식당이나 카페를 선호하고, 직원 대신 키오스크가 있으면 움찔하면서 다시 나갈까 고민한다. 고객센터에 전화하면 보이는 서비스보다 누르는 서비스를 선호하고, 정확한 확인을 위해 상담원 연결을 선호한다. 터치스크린보다 누르는 버튼에 익숙하고 시리(siri)나 지니(genie)처럼 세상 똑똑한 AI보다 지적으로는 모자라지만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이 훨씬 편하다.


키오스크가 가장 보편화된 곳은 패스트푸드 매장일 테다. 키오스크 앞에서 나의 주문 속도는 패스트푸드가 나오는 속도보다 훨씬 느리다. 변명을 하자면……이런 식이다. 맥도널드에서 판매하는 불고기버거는 알아도 ‘리우1955버거’는 뭔지 모른다. 버거킹의 ‘와퍼’는 알아도 ‘콰트로치즈와퍼’는 뭔지 모른다. ‘비엔나커피’는 알아도 ‘아인슈페너’는 정확히 모른다. 주문을 하려면 이런 것들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알아야 할 것이다. 물론 메뉴판에 안내되어 있는 설명서나 사진을 보면 무지는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사실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죄다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경우나(우리나라가 이렇게 국제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지 몰랐다), 사진만 떡하니 있는 경우도 많고, 설명 없이 이름만 제시되어 있는 경우도 많다. 결국 주문을 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키오스크의 장점을 한방에 무너뜨린 나의 무지함이란!


나의 무지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직원에게 물어보는 거다. 근데 물어볼 사람이 없다. 매장엔 주문하는 사람과 먹는 사람, 그리고 내 뒤에서 내 주문이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뿐이다. 마흔살이라는 자존심은 있어서 뒷사람에게 버벅거림을 들키기는 건 싫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싫은 건 나의 디(지털 문)맹이 뒷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색다른 걸 선택하고 싶었던 나는 먹기 전부터 지치니, 그냥 아는 걸 주문하는 걸로 마음을 굳힌다.


자, 이제 두려움 가득 안고 키오스크 앞에 서서 터치를 시작한다. 3단계까지는 잘 가는데 옵션 창이 뜨면 다시 혼돈이 온다. 옵션은 넣으라는 건지 빼라는 건지, 아무것도 선택 안 하고 싶은데 이 단계를 건너뛰려면 또 어떤 걸 눌러야 하는지. 이렇게 생각하는 시간이 각 단계마다 3초씩만 늘어나도 뒷사람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그만큼 늘어나고, 그 늘어난 시간만큼 미안함은 커진다. 힝, 그냥 나갈걸.


나를 새침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요즘 식당이나 카페는 태블릿으로 메뉴를 안내하는 곳도 많은데 으레 ‘메뉴판 좀 주세요.’라고 하면 직원은 내 바로 앞에 놓여 있는 태블릿 pc를 가리킨다. 터치하면 보인단다. 시작과 동시에 시작한 버벅거림에 마음이 쫄린다. 2차 버벅거림은 계산할 때 온다. 요즘엔 카드 전용 매장이 많아지면서 계산할 때 소비자가 직접 카드를 꽂아야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게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으레 계산할 때 카드를 들이민다. 그럼 직원은 “앞 단말기에 카드 꽂아주시면 돼요.”라고 말하는데, 아… 나는 또 이 카드를 어디다 꽂아야 하는지 두리번거린다. 2초의 시간이 흐르면 답답해진 직원은 대신 카드를 집어 단말기에 꽂는다. 순간 밀려오는 민망함과 약간의 짜증이 밀려오는 걸 차마 숨길 수가 없다.


이 모든 과정을 겪은 후에야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실 수 있다. 그 커피가 맛있겠냐, 하면 참... 별로더라. 커피 맛이 문제가 아니라 커피를 마시기까지 쫄림을 당한 데서 오는 우울함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세상은 초 단위로 변하는 데 비해 나의 머리와 몸의 변화 적응 속도는 달팽이가 뛰어가는 수준이다. 디지털 지식과 기술을 장착한 물건은 매일 업데이트되지만 사실 뭐가 업데이트된 건지도 모른다. 그래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이것저것 도전해보려고 사용설명서를 펼쳐보지만 2페이지부터 막힌다. 엉망진창으로 번역된 설명서는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녹록치 않다. 젊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자존심이 상하니까,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보다 더 싫은 건 알려줘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것이다. 앞에서는 다 알아듣고 이해하는 척 하지만 뒤돌아서면 다시 물어봐야 한다. 이런 굴욕이 반복되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신문물 영접을 포기하거나 물어볼 만한 사람을 찾거나. (물론 유료다, 대가가 보장되어야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하다못해 자식한테도 대가를 명시해야 계약이 성사되는 치사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난관이 존재한다. 교육자의 친절을 기대한다면 이건 지나친 바람이다. 질문에 대해 대답이나 잘 해주면 그것만으로도 사실 고마울 때가 많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에 ‘터-얼치’ 기능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오로지 ‘만지다’라는 뜻으로 ‘타-치’를 배운 조상을 이해할 재간이 없을 뿐이다.)



머지않아 ‘노 키즈존’처럼 식당이든, 서점이든, 카페든 ‘노맹존(노-디지털 문맹)존’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기준 없는 기준으로 구분하고 분류하여 원치 않는 집단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막는 것, 효율성을 핑계로 손이 많이 가는 계층을 거부하는 것, 인건비 절약을 핑계로 사람보다 기계를 선호하는 것. 이것이 정말 우리가 바라는 미래지향적 사회일까.

나는 적어도 이런 것들이 보편화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건강한 사회는 외부적 조건으로 분류되고 구분 짓는 사회가 아니라 어떠한 기준으로 쉽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함이 존중받는 사회이다. 그러니까 못하면 배제되고 소외당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선을 긋는 대신, 변화의 속도와 같은 선에 놓이지 못하는 계층이 디지털 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권리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



덧붙이는 말: 싸가지를 운운하며 핸드폰만 보고 자리 양보 안 한다고 젊은이들을 비난하면서, 최신 스마트폰만 떡 하니 사놓고는 스마트하지 못하게 공공구역에서 큰소리로 모바일 뒷담화 하시는 꼰대님들 … 정말이지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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