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씩 새치 염색을 한다. 새치라고 하기엔 범위가 너무 넓다. 노화라고 하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겨우 마흔인데 새치 염색이라니. 이렇게 말한 지 일 년이 다 되어 가지만 적응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사람들은 죽는 게 두렵다고 하지만 사실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늙는 거다. 늙는 게 두려운 건 내 몸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생전 아프지 않았던 곳에서 통증을 느낄 때 아, 나에게 그런 신체가 있었지, 나에게도 그런 장기가 있었지, 하며 새삼 내 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를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늙어서 아픈 것'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수용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전까지는 반은 농담처럼 하고 농담처럼 받아들인다. 아직 내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이유 없이 몸이 시들할 때,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어제와 별로 다르지 않을 때, 의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고통을 견뎌내기 버거울 때, 치료의 속도가 더딘 이유가 노화 때문이라는 영혼 없는 말을 듣게 될 때, 반은 체념하는 마음으로 내 몸은 성장단계를 지나 노화 단계로 진입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노화를 받아들이겠다는 다짐보다 이 노화를 어떻게 해서든 늦출 방법을 찾는 나를 발견할 테니 말이다. 마음은 내 나이보다 한참 뒤에 있으니까.
독서 모임에서 대만 작가 경요의 <눈꽃이 떨어지기 전에>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이 책은 치매와 합병증으로 죽음을 앞둔 남편과 그를 바라보는 아내의 담담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에세이다. 남편은 자신의 병이 치료할 수 없는 단계임을 알게 되고 홀로 남겨질 아내에게 당부하는 말을 남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되면 일체의 인위적인 시술을 하지 않을 것. 어떤 식으로든 삽관을 하지 말 것’ 그의 마지막 소원은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존엄하게 죽는 것 그것뿐이었다.
책을 읽어온 사람들은 그의 요구가 이기적이라 했고, 그의 요구를 무시한 채 연명치료를 시도한 자식들의 선택에 동조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자식은 왜 생각하지 않으냐고, 남은 사람이 가질 슬픔은 생각해보지 않냐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어떻게 짊어지고 살라 하느냐고.
그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의 위치가 아닌 남겨질 위치가 자신이 될 것이라는 입장에서 오롯하게 인물들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조금은 슬펐고 조금은 씁쓸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판단력을 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 놓였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자신은 남아 있는 사람이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위치에서만 생각하고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 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걸 놓치는 건 아닐까.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몸이 늙어간다는 이유로,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다는 이유로 치료를 명분 삼아 내 신체를 함부로 다루어도 아무렇지 않다고, 수치스럽지 않다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죽음 앞에서 수치나 부끄러움이 뭐가 대수냐고 쉽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수치와 부끄러움은 피하고 싶고 자신의 존재는 존중받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수치와 생명을 바꿀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죽음이란 걸 피할 수 없다면 말이다.
보호자라는 이유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 몫이란 이유로 타인의 존재를 함부로 다룰 수 있는 더 큰 존재는 없다. 한 사람의 존엄성의 무게를 결정할 수 있는 건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의지하며 내 삶을 타인의 삶과 공유하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하고 판단할 수 있는 온전한 개인임을 전제로 했을 때 비로소 행복하고 즐겁다고 느낀다. 죽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내가 죽음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걸까.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의학 기술 앞에서, 나의 병이 누군가에게는 돈벌이의 수단이 되는 비극적인 현실 앞에서 죽음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평화롭고 존엄하게 죽음을 준비하려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저항할 수 없는 수많은 힘들일 테다.
죽음의 최전선 앞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붙들고 싶은 간절함과 내가 그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선택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또는 떠날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위로가 될지 나는 함부로 말할 수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건 각자가 감당하는 몫이기 때문에 경중을 논할 수도, 정의를 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게다가 조언이랍시고 함부로 죄책감을 운운하는 건 더더욱 아닐 테다.(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는 책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분들이 많았는데 가장 크게 느꼈던 두려움은 죽음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주변 사람들의 질책과 그로 인한 죄책감이라고 말했다.)
남겨질 슬픔을 생각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야 하는 사람의 진짜 고통이 무엇인지 외면하지 않는다면 남겨진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적어도 단 한 움큼은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들이대는 '비인간적'이라는 프레임은 마땅하지 못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 내 옆에서 조용히 존엄하게 마지막 숨을 쉬고 싶다는 말을 듣고도 내 맘대로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비인간적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