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의 승객 일지
12. 어쩌면, 기회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살다 보면 기회와 귀인은 누구에게나 온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회를 모두가 잡는 것은 아니다.
나는 주어진 환경에서 열린 마음과 노력으로 기회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늘 갈망하고, 수용적인 태도로 배우며, 적은 가능성에도 도전했던 삶의 방식이 나를 지금까지 이끌어왔다.
사람들은 가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넌 정말 잘 풀린다. 하고 싶은 걸 다 이루는 것 같아.”
“넌 참 열정적이고, 뭐든 척척 해내는 사람 같아.”
그들의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나온다.
그들은 나의 밝은 면만 보고 이야기했다 생각했다. 나도 약했고, 여전히 부족하다.
그래서 나는 내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도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고 싶다.
특히 최근 나를 더 성장하게 만들었던, 귀인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그날은 너무 힘들었다.
기회와 귀인을 만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하행 승무에서 몰아치는 스케줄을 겨우 마치고, 짧은 대기시간 동안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상행 열차에 올라탔다.
좌석은 매진, 추가 서비스 구간은 길어졌고,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서비스직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지쳐 있을 때, 손님 한 명 한 명과 대화하고 웃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내가 유난히 친절했다.
컨디션은 최악이었지만, 내가 마주하는 모든 손님들에게 자연스럽게 미소가 나왔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편안한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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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손님들과의 대화가 유난히 길어졌다.
와인에 대해 열정적으로 설명하던 손님, 여행에서 겪은 사건을 이야기하던 손님, 서비스업의 고충을 털어놓던 손님까지.
짧게는 몇 분, 길게는 열댓 분씩 이어진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신선했다.
하지만 업무를 해야 하는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야기가 좋긴 한데, 언제쯤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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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한 손님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평생을 인류학 연구를 하시다가, 최근 환경에 관심을 두며 갯벌과 해양 생태계를 연구하는 교수님이셨다.
우리나라 제일가는 대학교의 교수님이셨던 그 손님은 10년 만에 동창들과 만남 후 열차를 타신 듯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와 열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환경과 갯벌, 그리고 연구는 내가 평소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주제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의 눈빛, 손짓, 그리고 연구 이야기를 전하는 태도는 묘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무엇보다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무언가에 매료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가 미안한 듯 말했다.
“제가 승무원님 시간을 너무 뺏었죠.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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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오히려 더 듣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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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원 생활 처음으로 해본 멘트였다. 내가 오히려 더 듣고 싶어 한다니..
그의 이야기는 출판으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연구를 담은 책을 출판하기 위해 수없이 수정하고 도전했던 과정을 들려주었다.
“처음엔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투고를 이어갔습니다. 세 번의 수정 끝에 드디어 출판 승인을 받았죠.”
그 순간 나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
“사실 저도 출판에 관심이 있어요. 사람들에게 제가 보고 느낀 세상을 글로 전하고 싶어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잠시 멈춰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좋은 관점이에요. 승무원님은 이미 충분히 작가로서의 눈과 귀를 가지고 계시네요.
특히 이야기를 들을 때 반짝이는 눈빛이 정말 인상적입니다. 인류심리학에 관련된 연구가 필요하면 제가 도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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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한마디가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사실 나는 출판이라는 꿈을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막연한 계획에 머물러 있었다.
‘언젠가는 해야지.’
그저 이렇게 생각만 하고 있었던 나에게, 그의 말은 신호와도 같았다.
‘지금 시작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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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브런치 작가로 지원서를 작성했고, 한 번에 합격했다.
그리고 출판사 투고를 시작하며 작가라는 새로운 꿈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묻는다.
“어떻게 너는 이렇게 잘 풀려? 하고 싶은 걸 다 이루는 것 같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속으로 미소 짓는다.
‘사실 나는 잘 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늘 마음을 열고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만약 내가 그날 교수님의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그냥 흘려들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내 출판의 꿈은 여전히 막연한 꿈으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다.
좋은 기회와 귀인은 생각보다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 스쳐가는 순간들 속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결국 우리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