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 승무원의 승객 일지
#11. 조선시대 가는 KTX? 승객들과의 기묘한 대화
혼자 근무하는 열차 승무원은 조용히 순회를 하다가도, 가끔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드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천 명 넘는 승객들과 부딪히다 보면 말을 멈추고 싶은 날도 있지만,
예상치 못한 대화가 선물처럼 다가오는 날도 있다.
그 대화들은 피곤한 하루에 웃음을 선사하고,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아니, 조선시대요?
바쁜 업무 중, 한 손님이 다가와 물으셨다.
“여기 광주송정역 가나요?”
하지만 주변 소음 탓에 내가 들은 건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조선시대 가나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조선시대? 설마?
‘다양한 사람들이 많으니..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과 동시에 엉겁결에 되물었다.
“네? 조선시대요??”
질문하셨던 손님도 놀란 표정으로 되물으셨다.
“조선시대요..??”
우리는 잠시 눈을 마주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제가 너무 웃어서.. 죄송합니다.”
손님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KTX는 시간여행도 되는군요?”
그 후로도 손님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혼자 웃음을 참지 못하셨고,
나도 몇 시간 동안 그 장면이 떠올라 피식거리며 일을 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조선시대로 출발한 기분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한 가족이 가족 동반석에 옹기종기 모여
다음 여행 계획을 위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아빠 : 우리 다음엔 부산으로 갈까? 바다 좋잖아.
엄마 : 아니, 전주 가야지. 맛있는 음식 많잖아.
아이 : 나는 해외여행 가고 싶어.
그러더니 가족이 나를 향해 물었다.
“승무원님은 다니시면서 어디가 제일 좋으세요?”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기차 빼고… 아니, 집이 제일 좋아요.”
모두가 “아…”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에게 기차란 일하는 장소뿐인 걸.
직업병의 무게
폭우로 인해 열차가 지연이 되던 날, 한 승객이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늘도 날씨가 정말 미쳤네.”
옆사람이 맞장구쳤다.
“그니까요, 열차도 요즘 매번 지연되고, 너무 화가 나요.
매번 날씨 뉴스도 틀리고, 이럴 줄 알았으면 열차라도 안 탔겠죠.”
지나가던 내가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지연을 최대한 잡을 수 있도록 저희 승무원들이 노력하겠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승객의 말.
“아.. 죄송해요 제가 기상청 직원이라서요.”
우리는 멋쩍게 웃어넘겼지만,
그 승객의 어깨는 승무원의 어깨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방송만 할까요?
그날의 객실 방송 담당이었던 나는 정차역을 앞두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난 후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돌아보니, 한 아저씨께서 나를 뻔히 쳐다보고 계셨다.
‘왜 그러시지? 볼일이 계신가?’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아저씨가 입을 떼셨다.
“승무원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요! 이제까지 들었던 방송 중에 아주 최고예요!”
기분이 좋아진 나는 감사의 말을 건넸다.
“정말요?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돌아오는 아저씨의 말이 더 웃겼다.
“아, 방송 목소리가 더 좋으시네.”
“아… 네.”
이렇게 우리의 대화는 짧고 유쾌하게 끝났다.
순간 조금 당황했지만, 그 한마디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날은 방송 목소리가 진짜 내 목소리보다 좋았던 하루로 기억된다.
기차는 단순히 목적지로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이동 수단이 아니다.
작은 대화 속에서 엉뚱한 웃음이 터지고, 진지한 공감이 오가며, 그 과정에서 쌓인 기억들이 나를 미소 짓게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승객들의 기묘하고 유쾌한 대화를 엿듣는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닫는다.
기차 안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목적지가 아니라, 그 여정에서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이다.
길을 걷다가, 대중교통에서, 혹은 누군가와 무심코 나눈 대화 속에서 느꼈던 따뜻한 순간들이 있다면,
그 소중함을 되새겨 보길 바란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작은 웃음과 따뜻함이 결국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