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하지 않으려 했던 당신

여전히 마음속에 머무는 이야기

by Ha Eun Marel



어떤 사랑은 끝났는데도, 여전히 삶 속에 머물러 있어요.
말하지 못한 마음, 놓지 못한 기억, 그리고 나만 알고 있는 대답들.
그 모든 것을 안고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그를 간헐적으로 떠올린다.

더 이상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니지는 않지만, 여전히 나타난다.

희한하게도, 늘 내가 겨우 평온의 섬에 닿았을 때 돌아온다.

그때, 그는 어김없이 거기 있다.


가끔은 그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내가 모르게 그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고요히 머물면 내 안 어딘가에서 기억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어쩌면 그는 떠난 적 없고

내가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 메시지가 떠오른다.

내가 끝내 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그는 한 문장으로 덮었다.

휴대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대신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루 종일, 단어를 찾아 헤맸다.

그래도, 어떤 말도 충분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상처에는

닫아주는 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지도.



우리가 나눈 모든 것을 다시 읽었다.

웃음들, 의심들, 텅 빈 여백들.

내가 미처 읽지 못했던 신호들을 찾아 헤맸다.

그도 그랬을까.

그도 우리의 사진을 다시 봤을까.

무언가, 언젠가, 그에게도 아팠을까.



그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마주쳤던 그곳에서.

그는 원하지 않겠지만,

내 안의 고집스러운 예감 하나는 뭔가 일어날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익숙한 통증.

한때는 너무나도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


‘그 사람’에서

‘그랬던 사람’으로 변해가는 과정.

한때 집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림자처럼 희미해질 수 있을까.


삶은 그런 식으로, 잔인하게 알려준다.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법을.



가끔, 아무런 경고 없이 그 기억이 돌아온다.

혼자 있을 때, 어둠이 내려앉을 때,

내 안에 너무 오래 머무를 때.


무서운 건, 그 기억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때로는 그게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의 유령 같은 존재가

세상의 공허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차라리 그렇게라도 느끼고 싶다.

완전히 무감각해지는 것보다는.



왜 나는 항상 두 번째일까.

왜 나는 늘 선택받지 못하는 쪽일까.

심지어, 함께하자고 약속한 사람조차

나를 먼저 선택하진 않았다.


나는 전부를 다 주었다.

하늘도 땅도 움직였다.

그들은… 겨우 한 걸음 내딛는 정도였다.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

아니면,

반쪽짜리 사랑만 반복해서 받아오다 보니

진짜 사랑이 와도 알아보지 못하게 된 걸까.


가끔은 순진한 이상주의자 같고

가끔은 다 주고도 아무것도 받지 못한

어리석은 여자 같아서

어느 쪽이 더 아픈지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내린다.

식어버린 채 탁자 위에 남는다.


나는 또 그렇게 있다.

존재하지 않으면서 움직이고,

움직이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로.







내 몸은 여기 있는데,

나는 다른 시간에 머물러 있다.

우리였던 그때에.


그러다 문득 울기도 하고,

문득 웃기도 하고,

그 둘 사이 어딘가에서 멈춘다.


살아 있는 건지,

기억만 하고 있는 건지

헷갈리는 순간들 속에서.



어떤 날은 모든 것이 그를 떠올리게 한다.

어떤 노래,

어떤 향기,

낯선 사람의 눈빛 하나까지.


세상이 그를 내 안에 다시 데려오려

공모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리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신적으로는 분명히 돌아온다.


그가 미워진다.

그리고 그런 나 자신도 미워진다.

이제는 정말로 놓아주자고 다짐하면서도

언제나 또 다른 ‘징조’가 나타나고

내 다짐은 물에 녹은 소금처럼 사라진다.



가끔은 다른 삶을 상상한다.

조용한 남쪽 바다 끝에, 우리가 아직 함께 사는 마을.

우리는 여전히 함께 살고 있다.

맨발로 집 안을 뛰어다니는 우리 아이.

저녁을 준비하는 나,

퇴근하고 들어오는 그.


세 식구가 함께 밥을 먹고,

웃고,

단순한 하루를 산다.

밤이 되면 나는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잠든다.

예전처럼.


그가 알고 있을까.

지금의 그 삶이

내가 내린 고통스러운 선택들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그가 나와 함께하지 않기로 했던 그날,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했다.

그 ‘더 나은 사람’은

나와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나는 나의 행복을 희생했고

그는 자신의 삶을 지어 올렸다.

나는 지금도 보이지 않는 값을 계속 치르고 있다.

등에 짊어진 돌처럼.

보이지 않지만 무겁고,

단 하루도 벗을 수 없다.



어느 날,

그가 그녀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돌아갔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는 그걸 별것 아닌 듯 얘기했지만

나는 알았다.

그 선택에서 지금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걸.


그는 모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알고도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그 모든 것이 나에게서 비롯되었단 걸.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마음,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다짐,

머무르고 싶은 충동,

부드러워진 손길,

부모로서의 따뜻함,

지금 사랑하는 이에게 내어주는 그 평온한 사랑까지.


그 모든 감정은 우리에게서,

내가 그에게 준 것들에서,

그가 잃고 간 것에서 태어났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가운데 매듭이 남아 있다.


그가 아이와 놀고,

동화를 읽어주고,

머무르기로 선택한 이에게 입 맞출 때


나는 여전히 그가 두고 간 기억들과 함께

여기에 남아 있다.







그의 느릿한 숨결.

허리를 감싸던 손.

사라질까 봐 조심스레 쥐었던 손끝.

그 모든 것이 내 안에 남아 있다.


그 삶에서는 두려움이 없다.

평온만 있다.

아프지 않은 사랑이 있고,

머무르게 하기 위해

나 자신을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 있다.



그가 나처럼 간절히 믿었다면,

아마 그 세계는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거울을 본다.

내가 누구였는지

이젠 잘 모르겠다.


그를 꿈꾸던 나도,

그를 기다리던 나도,

그를 떠난 나조차도

지금 이 나는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다.

상처로 덧칠된,

조금은 조용한 사람이지만

그만큼 더 섬세하게

살아 있는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한쪽은 침묵 속에 있고,

다른 쪽은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삶.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이, 조용히 머물러 있는 이야기.


-Ha Eun Mar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