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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Aug 08. 2019

예술보다 예술이 하는 말

2019.8.7

누군가는 내게 예술가라고 한다. 예술가라는 말은 이미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퍽이나 가진 특별한 사람을 뜻하는 듯한데 나는 그냥 예술이란 장르로 뭔가를 표현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보는 편이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저마다 달라서 나는 그저 내 눈에 아름답거나 그렇지 않거나로 예술이다 아니다를 취향처럼 구분하기도 한다. 예술의 어느 장르를 이용해 표현하려는 사람의 마음이 혹은 그 사람이 아름다우면 나는 예술가라고 하고 있다. 거기엔 내 가치관이 한몫하는 것 같다.


종종 예술이 자신이고 자신이 예술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곤 하는데 예술이 그저 수단인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다 있구나 한다. 아무튼 예술에 내 취향만 있고 다른 고매한 기준은 넣지 않으려한다.


그나마 내가 조금이나마 기준이 마구마구 발동하게되는 장르가 있다면 학교에서 배운 문학과 학원에서 배운 음악이다. 확실히 영향을 받는 방식이 아니라 배우는 방식의 예술은 예술을 방해하는 여러 단점을 가졌다.


교육방식이 예술적이지 않은 예술교육, 어떤 예술에 영향을 받아 선택하는게 아닌 졸업장이나 겉치레를 위해 예술교육을 이용하는 사업가와 사회.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산재해있는게 예술교육현장이다.


그렇게 교육받은 예술은 새로이 예술에 뛰어드는 다음세대에 다양한 기준을 적용해 합격, 불합격 또는 우등, 열등을 나누고 그 공동체 안에서 순위를 매긴다. 경쟁의식에 가득찬 예술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어느덧 예술보다는 점수와 등수에 구애받는다.


기술이 중요할 수 있다. 기술도 예술이 될 수 있지만 기술보다 중요한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기술을 익히는 억압된 교육환경이 기술보다 중요한 감각들을 없애버리는 구조다. 문제를 의식하는 자가 문제제기를 하면 권력에 의해 압도되는, 이 사회의 심각한 위계의식도 그 안에 있다.


학교를 떠나고 집도 떠나고 어떤 기준으로도 떠나온 상태는 자유로울 줄 알았건만 조금 자유롭고 심각한 금단현상의 늪에 빠질 판이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지에 대한 질문은 틈틈이 내 삶을 비집고 들어온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내 안에 있기때문에 이젠 괜찮다고 생각했건만 내 방식을 낯설어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는 기술이 나에게 별로 없어서 불안과 피로함은 끊임없다.


할 줄 아는게 노래와 글쓰기밖에 없는데 그것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내 안의 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인데 그런 나는 여전히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다. 그걸 방해하려는 이가 딱히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이 모양이라 짜증난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왜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 새벽은 어쩜 이리 괴로운지. 괴로워서 그런지 막 욕하고 싶다. 아무나 막 욕하고 싶다. 슬프지만 딱히 없다.


예술이고 뭐고 일단 좀 평가나 좀 안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제바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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