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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장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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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와 Feb 26. 2020

아무리 닭이 먼저라고 해도

2020. 2.26

일주일 정도 불편했던 마음이 이제야 자리를 잡은 것 같은 이유는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 것은, 그래서 그게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두고두고 삶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내가 그러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아들러’의 말을 부분적으로 동의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작았던 불편함이 생각을 거듭하다보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는 것을 알게된 지금의 나이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아는 나의 어떤 부분을 그들은 몰랐고, 내가 모르는 어떤 부분은 그들이 알았다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해보기도 했다.


내 인생에는 ‘드라마’가 없다고 내가 말하고 다닌 것이 ‘누구라도 그런 상황을 만들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지만, 한편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었냐 누군가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다. 세상의 어떤 상황이 내가 원하는대로만 흘러간단말인가. 관계나 형편때문에 알아서 생겨나는 것을.


내게 ‘좋은 기회’라는 것이 내가 그렇게 판단할 때 ‘왔다’고 느끼기도 하겠지만 내 판단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리 느끼지 못하기도 할 것이다. 안다, 나도. 하지만 선택은 나의 몫이 되어야하는데 나는 왜 항상 선택의 기로에서 강요당하는 느낌일까. 그렇게 이끌리거나 싸우며 살아온 세월이 되짚어보면 내 삶의 대부분이다.


내 선택권리를 박탈당하는 느낌이 싫어 마구 반항하던 학창시절의 나로 돌아간 느낌을 서른이 지난 지금, 하필 마음을 열고있는 이곳에서 느낄줄이야. 나의 역사 속 아픈것들이 무턱대고 밀려와서 한 일주일은 휘청휘청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제대로 후회하기 어렵고, 내가 끝내지 않으면 미련만 남는다는  그러니까 내가 시작하고 끝내게 두라는 이 당연한 주장을 해야하는 상황은 무엇때문에 이 나이가 되어도 이렇듯 종종 나를 찾아오는 것일까.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 역시 나의 모자람이나 서툼이 문제인걸까. 나는 더이상 누구도 미워하고 싶지 않다, 나조차도.


생각을 하다보니 장흥에서 이런 일이 내게 두번째였다. 한번은 어떤 단체 사무국장을 제안 받았는데 거절을 해도해도 계속 이유를 끄집어내어 거절을 반복해야하는 일. 내 이유를 상대가 납득하지 못하는 상황이 장흥에 온지 몇개월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그 때는 나와의 관계가 얕은 사람들의 제안이라 후폭풍은 기분나쁨 정도였다면 이번일은 후회와 자책, 실망과 설움이 뒤섞인 골치아픈 쓰나미였다. 나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나를 존중해주고 있다고 믿었던 친구들의 제안은 더 무거웠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걸 그들은 알까.


나 때문에 누군가의 일이 그르치게 되는 건 싫은데 이번일이 그랬을까. 나는 여전히 마음쓰고 있다. 줄탁동시. 내가 나의 알을 깨고 나가고 싶지만 나는 아직 그럴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겁먹고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의 행동은 밖에서 내 껍데기를 깨주는 일이었을까. 내가 생각하기엔 그게 아닌데. 왜 나오지 못하느냐며 혼이나는 느낌이었을 뿐이었다.


알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라는 질문에 닭이 먼저라고 대답한다고 한들 알 속에 있는 어린 닭이 아직 스스로 나갈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도 껍질을 깨버리는 게 맞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지금보다 훨씬 방어적인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좀 들었는지 왠만하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이해를 하려는 쪽을 선택하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그 일을 진행하려는 이유를 ‘해와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라는 말이 아닌 그들에게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말했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어쩌면 내 고민의 범위가 나의 역량과 기질을 넘어 모두의 일에 도움이 되는 일처럼 느껴서 다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까. 이제는 그들의 마음을 내게 들려줄까.


나는 단호하게 확신 하고 싶던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 탓에 우유부단해져버렸고, 감정의 골이 깊어져 극단적인 상황이 오도록 그냥 두지도 못한다. 또 다시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또 어떨까. 거절해도 이해받을 수 있을만큼 친구들이 나를 믿을 수 있게 됐을까. 아님 지금처럼 이끌어주고 밀어줘야 할 것 같은 걱정스런 친구로 남아있을까.


그때는 미움을 받더라도 단호하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을까. 어린 닭은 알을 깰 수 있을까. 어쩌면 애초에 껍질을 깨고 나와 있던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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