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에비터블> 독후감
엉켜 있는 열두개의 거대한 파도를 가장 잘 요약한 문장은 바로 이 문장일 것이다.
이 시대에는 누구나 새내기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겸손할 수 밖에 없다.
앞으로 30년동안 삶을 지배할 중요한 기술들은 대부분 창안되지도 않았고, 당연히 새로운 기술 앞에서 우리는 새내기가 될 것이다.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이 되는 주기도 가속화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토끼와 거북이의 딜레마처럼 아무리 빨리 달려도 앞서오는 기술을 따라잡지는 못할 것이다. 어차피 세상이 변하는 것은 ‘inevitable’한 것은 자명한 바, 이 진리 앞에 세상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끊임없이 배우거나, 배우기를 포기하는 것.
결국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불투명하고 급변하는 미래를 조금이나마 나은 방법으로 대비하고 싶어서인데, 적어도 이 책을 집어든 분들은 그런 점에서 ‘겸손한 follower’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는 노다지를 캐고 싶은 것일 수 있다. 마치 2017년 지금, “내가 8년 전에만 비트코인을 알았었다면!”을 외치듯이. 상상할 수도 없이 바뀌어 있을 2050년이라는 시대의 비트코인은 무엇일까? 아니 당장 2025년의 비트코인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되어가고’, <인에비터블>이라는 두려운 제목의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기억을 돌려본다. 마치 구글에서 검색하는 것을 누구나 ‘Googling’이라고 지칭하듯이, 기록한 기억을 자신만의 렌즈에서 돌려보거나, 모두가 볼 수 있는 스크린에 띄워 보는 것을 ‘Redo’ 혹은 ‘Redoing'이라고 한다. 출국장에서는 바로 5시간 전에 만난 사람들의 영상을 스크린에 띄워서 입출국을 관리한다. 친구들이랑 와인 한잔씩 마시면서 TV 스크린에 오늘 있었던 기억들을 틀어놓고 같이 키득댄다. 한편으로는 오늘 면접에서 면접관이 ‘We will look forward to seeing you again.”라고 말하며 악수한 장면을 자기의 렌즈에 틀어놓고, 되뇌이고 또 되뇌이면서 이게 합격이라는 건지 불합격이라는 건지 골똘히 생각한다.
가까운 미래에 첨단기술이 인간의 욕망을 실현해주면서 일어날 수 있는 암울한 현실을 영국 특유의 위트와 상상력으로 풀어낸 Nexflix Original " Black mirror "라는 영국 드라마에서 나온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꽤 근시일내에 가능할 것이란 확신이 든다. 케빈 켈리가 말한 것처럼 현존하는 것 중에서 우리와 가장 가까이 상호작용하는 것은 'wearable'한 것이며, 더 내밀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피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의 공상과학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모두가 뇌 깊숙이 무엇을 박고 거추장스럽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생각보다 빠른 시점 안에 이 영드에서 구현된 것처럼 시신경과 뇌를 연결한 무언가가 우리 귀 뒤에 센서로 붙어 있고, 우리가 그걸 세련된 방법으로 조작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마우스 안에 있었던 마우스볼처럼 손안에서 동그란 무언가를 문지르는 것만으로도 조작할 수 있는 세련된 터치감!
5-10년 안에 상용화될 IoT 세계에서 두툼한 스마트폰 디바이스는 곧 사라지고, 눈의 렌즈, TV, 컴퓨터, 창문, 심지어 내 앞의 우유 곽까지 하나의 스크린이 되어서 손에 항상 지니고 다니는 조그만 버튼하나로 내 기억의 영상이 그 곳에 쫙 펼쳐져 누구나 보고 기억을 '향유'할 수 있는 세계가 될 것이다. 케빈 켈리가 예견한 ‘화면을 보고’, 조그마한 터치와 손가락 두개로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의 극치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세계경제 전체는 물질을 떠나 무형의 비트로 넘어가는 중이다. 소유에서 접근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뒤섞기의 세계에서는 이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법은 어떤 것일지 고민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10초 정도의 드럼 반주가 나오고 메인 선율이 시작되는 누가 들어도 귀에 익는 hooking 선율을 특허에 등록할 수 있을까? Spotify, youtube를 통해 이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끊임없이 다운받고, 업로드하고, 비슷한 리듬으로 리믹싱을 하고 있는 세상에서, 누군가 특정한 선율을 소유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결국 이제는 이런 현실이 올 것이다, 안 올 것이다의 담론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 열두가지 파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도래하게 될 텐데, 이제는 이런 기술의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과, 이것을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우리만의 정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억을 무한반복으로 보고, 듣고, 또 돌려보도록 상대방에게 강제할 수 있는 세계에서 우리의 관계들은 온전한 방향으로만 발전할까? 삼년 전에 배우자가 무심코 했던 말을 되돌려서 ‘네가 그때 이렇게 말했잖아!’라고 끄집어 내는 판독과정이 우리 삶을 진정 풍부하게만 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섬세하고 세세한 부분들까지 사회적 논의와 합의 도출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정의 실현을 위해 이런 기억 되감기를 법정에서 어느 정도까지 강제할 수 있는가
정부는 개인들의 기억들을 어디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선택권이 있는가
(심지어) 소중한 사람들에게 기억을 되돌려 다같이 보자고 요청할 권리가 있는가 - 나만이 기억하고 싶은 당황스러운 면접 장면을 같이 보자고 한다면?
다행스럽게도 미래가 미친듯이 암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치 스마트폰도 아닌 휴대전화가 처음 나왔을 때, 이 기계가 상용화가 된다면 우리의 지하철은 엄청난 소음으로 가득차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리라는 미래학자들의 예견과는 달리, 우리는 어떻게든 ‘규범’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조용히 문자를 보내는 법을 터득했으며, 공공장소에서 이 기계를 다루는 법을 만들었고, (더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휴대폰 덕분에 우리의 지하철은 오히려 더 조용하고 기본적인 에티켓이 지켜지는 장소로 변했다. 가상게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 사람들이 가상현실 세계에 빠져 가족들도 분간하지 못하고 죽이고 총 쏠 것이라는 험악한 예견과는 달리 세상은 생각보다 재미있는 장소로 변했다. 누구도 긴밀한 사생활을 지인들과 공유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초기의 야유와는 달리, 인스타그램은 전세계 수억의 팬을 보유하고 있고 가장 보수적이라는 정부기관들조차 신세대들과 가장 긴밀히 소통하기 위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파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떻게든 적응해나갈 것이다. ‘뒤섞기'의 세계에 걸맞는 규범들이 서서히 만들어지긴 할 것이다. 나는 기술은 결국 인간을 이롭게 하고 서로를 보완하는 'soft future'를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Black mirror가 풍자하는 암울한 상상만들이 현실세계에 일어나진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겸손한 follower로서 ‘되어가고’, 끊임없이 배우고, 자각해야 하겠다.
나름대로의 비트코인을 찾아 헤매는 모든 인에비터블 시대의 새내기,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