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고발서 <카오스멍키> 독후감
창업해서 트위터에 매각, 페이스북에 합류 후 여러 공작 이후 다시 트위터로. 사람들이 정말 알고 싶어할 스토리다. 실리콘밸리와 페이스북. 그속의 정치질. 침몰하는 배에서 달아나는 방법. 껍질 벗긴 외설스러운(?) 독백. 비즈니스 세계의 협작과 살아남는 방법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2017년 추천 제1의 책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영광된 순간이나, 나는 언젠가 이와 같은 불운이 나의 조국에도 드리우리라는 예감에 몸서리쳤다 - 이보다 더 정치가답고 심오한 말을 남기기는 어려울 터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승리이자 적에게는 최악의 재앙인 이 순간에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고 상황의 전환에 대해 생각하며, 성공이란 변덕스러운 운에 달려 있음을 명심하는 이야말로 위대하고 완벽한 인간이자 후대에 기억되어 마땅한 인물이다. - 폴리비오스, <역사>
솔직히 올해 읽었던 마흔 여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특유의 거만함,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여러 에피소드들, 중간중간의 욕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작가에게 애착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시의적절한 인문학적 풍자 때문이었으리라. 매 장 앞에 인용하는 고전들의 수준은 상당했다.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도와준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물리학 박사 치고는 인문학적 감성이 풍부하게 느껴졌는데, 중간에 어머니(혹은 할머니) 때문에 어릴 때부터 도서관에서 살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이해가 되었다. 진짜 자기가 쓴 것이라니! 이게 빨리 다음장을 넘겨보고 싶은 원동력이 됐다. 작가가 단순히 싸구려 욕설과 외설적인 말로 일관했으면 짜증에 책을 빨리 덮어버렸을지 모르나, 그가 어릴 때부터 수천권씩 읽어왔을 고전들에서 나오는 아이디어와 비유들은 실리콘밸리의 더러운 협작사를 부끄러우리만큼 잘 표현했다. 중간 중간 나오는 유럽 전쟁사에의 비유, 탈무드와 성경의 말씀, 그리고 서양 고전의 인용은 매우 적절했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서사였다.
모든 사업가의 열망은 언젠가는 사회가 가격표를 붙여도 좋다고 여길 정도의 회사를 내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똑똑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모습을 보고 박수를 치고, 내가 그중에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이런 신화에 대한 갈망은 비단 실리콘밸리 뿐만 아니라 중국도, 한국도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가장 가고 싶은 회사 1위로 꼽힌다는 페이스북 본사 직원들이 어떤 정신상태로 일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물론 페이스북이 이젠 더 커졌고 100%가 이런 정신머리로 일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페이스북은 진짜, 진짜, 진짜 돈 때문에 일을 하는 게 아닌 진정한 광신도들로 가득하다는 것은 가히 무서운 일이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페이스북 로고를 알아보는 그날까지는 진짜, 진짜, 진짜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 차라리 부에 대한 욕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웃돈을 얹어 주면서 꼬실 수 있지만, ‘비전’에 미친 사람은 이성적으로 꼬실래야 꼬실 수가 없다. '매일 저녁 6시가 넘어서까지 일하는 것을 꺼리는 회사를 위해 내 커리어 최고의 기회를 날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는 작가의 말처럼, 스타트업 창업자든, 페이스북과 같은 대기업의 일원이든, 이런 정신상태로 일하고, 즐기는 사람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된다. 카오스 멍키와 같은 ‘비전에 미친’ 사람들이 대담하게 사회를 완전히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정신없는 원숭이들처럼 기존 사회를 흔들고 있다. 이들 속에서 과연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도 작은 원숭이 새끼가 잘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떤 포지셔닝을 해야할까. 어떤 리더가 되어야 할까.
600여 쪽이 넘는 대서사시를 마치고 태평양의 요동치는 파도 속으로 사라지는 작가의 마지막은 강렬했다. 지금 페이스북의 캠퍼스는 사라진 IT 대기업 선마이크로시스템스의 소유였다. 저커버그가 선의 로고를 모두 떼어내는 대신, 몇개는 그대로 두도록 한 것은 memento mori, 페이스북 또한 멸종되어 로고만 남겨질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리라. 마침 트레바리 쩐빵에서 진시황제의 내면을 다룬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를 읽었는데 두 책이 주는 깨달음이 참 오묘하게 겹친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거대한 중국 천하를 통일했던 진시황도, 지금은 세계를 점령하고 있는 저커버그도 나중에는 낡은 고대 유물이 된다. 심지어 이 책에서 저커버그를 바짝 긴장한 카르타고 장군으로 만들었던 구글 플러스는 단 3년만에 실패작으로 사라졌지 않은가(누군가는 쓰고 있겠지만!). 저렇게 날카롭게 치고 받고, 속이고 또 속이고, 남을 짓밟고 올라가 부를 축적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인상쓰고 생각하게 만든다. 자본주의에 대한 회의를 넘어, 인생에 대한 회의까지. 대단한 책이었다.
페이스북의 기업공개 다음날의 지치고 숙취로 쩔어있는 회사 분위기를 기억하라. 솟구쳤던 흥분감은 알맹이가 없는 그 의식이 끝나기도 전에 끝났다. 이런 수준의 구경거리조차 만들어내지 못할 때, 문화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자본주의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책을 가히 ‘한편의 짧은 역사서’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다.
cf. 600쪽이 넘는 책을 읽긴 부담스럽다!라고 하면 아래의 팟캐스트를 들어볼 것. 저자가 1시간 20분만에 600쪽의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털어낸다. 말투도 인상적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