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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Nov 27. 2023

프롤로그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유목민이다

유목민   (명사) 목축을 업으로 삼아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사는 민족.

 표준국어대사전은 유목민을 이렇게 정의한다. 하지만 목축업에 종사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무언가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표현할 때 유목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전셋집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전세 유목민, 자신에게 맞는 미용실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미용실 유목민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외에도 케이팝 유목민, 선크림 유목민, 유산균 유목민 등 오늘도 자신의 취향에 만족스럽게 딱 들어맞는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이곳저곳을 기웃대며 살아가고 있다. 아마 누구에게나 그런 분야가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어떤 분야에서만큼은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여러 방면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지만, 또 그만큼 많은 분야에서 정착했다. 뭔가 생각할 일이 있으면 입술을 뜯는 버릇이 있는 나는 한동안 립밤 유목민이었는데, 돌고 돌아 지금은 유0아쥬 립밤에 정착했다. 신발 역시 그렇다. 나는 문어가 아니기 때문에 신발이 그렇게 여러 개일 필요가 없으며 어차피 밖에 나갈 땐 제일 편한 운동화를 신게 된다는 걸 깨닫고 결국 스0쳐스에 정착했다. 몇 년간 다녔던 미용실이 사라져 한동안 떠돌다가 올해 드디어 새로 생긴 집 앞 미용실에 정착했다. 다행스럽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그동안 겪었던 시행착오가 쌓여 만들어진 빅데이터 덕분에 주어진 선택지들 사이에서 어떤 게 나에게 맞을지 빠르게 파악이 가능해진다. 인터넷 쇼핑으로 옷을 살 때도 “오, 이거 딱 내 꺼네.”하는 느낌이 들어 구입하면 대부분 잘 어울린다.


 어렸을 때부터 별로 물욕이 없었던 나는 부모님의 ‘갖고 싶은 거 없어?’라는 말에 뭔가를 사달라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보다 못한 아빠가 집 안에 우편함 같은 상자를 만들어서 갖고 싶은 게 생기면 종이에 적어 넣으라고 했으나 그 상자가 채워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로 필요한 건 부모님이 사주셨고, 필요하지는 않지만 가지고 싶은 물건은 굳이 사야 할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었다. 필요한 물건은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져도 여전히 필요했지만, 필요하지는 않지만 가지고 싶었던 물건은 욕망이 사라지는 순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욕망은 너무 쉽게 타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일단 장바구니에서 담아놓고 한참 동안 묵혀둔다. 내 욕망의 온도가 가라앉을 때까지.


 그렇다고 내가 딱히 금욕을 추구하며 검소와 궁상 사이를 오가는 삶을 사는 건 아니다. 나 역시 무언가를 욕망한다. 하지만 내가 소유하고 싶은 대상은 물질적인 게 아니라, 돈으로 살 수 없는 무형의 어떤 것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나는 ‘멋있는 그랜드 피아노’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손가락’을 가지고 싶었다. (이렇게 적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 신체 일부를 소유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 손가락으로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다는 의미임을 적어둔다.) 하지만 돈으로 조성진과 똑같은 피아노를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조성진처럼 피아노를 치게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럴 돈도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배우고 경험하는데 쓰는 돈은 잘 아끼지 않는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시간과 체력과 통장이 허락하는 선에서 해야 했고 배워야 했다. 빨리 배우는 편이기는 하지만 쉽게 질리는 나에게는 항상 무언가를 새롭게 배운다는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3n 년을 살면서도 나의 취미 생활은 여전히 어딘가에 정착하지 못했다. 사실, 정착하지 못했다기보단 일부러 하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떠나려고 떠난 게 아니라 이렇게 생겨먹은 탓에 자연스럽게 떠돌고 있었을 뿐이니까.


 최근에 어느 방송에서 게스트에게 살까/말까 할 때와 할까/말까 할 때, 각각 어느 것을 고르는 편인지 묻는 걸 보았다. 나는 살까 말까 할 때는 말아도 됐지만, 할까 말까 할 때는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뭔가에 꽂히면 일단 해봐야 하는 나의 시행착오를 담은 도전기이자, 덕질의 연대기이자, 취미 유목 생활을 하며 겪은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사진: UnsplashJosh 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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