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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Dec 18. 2023

내 인생 첫 운동, 필라테스(1)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1995년, 스위스의 동물학자 클라우스 베데킨트는 재미있는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 실린 실험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먼저 남성 참가자들에게 깨끗한 티셔츠를 입혀놓고 이틀 동안 못 씻게 한다. 이틀 뒤 셔츠를 회수한 다음, 여성 참가자들에게 냄새를 맡고(!) ‘기분 좋음’과 ‘섹시함’ 정도를 평가하게 한다. 이 실험의 이름이 바로 ‘땀에 젖은 티셔츠 실험’으로, 결과 역시 매우 흥미롭다. 여성 참가자 남성 참가자의 유전자를 서로 비교해 보니, 여성 참가자가 기분 좋고 섹시하다고 느낀 땀 냄새를 가진 성의 유전자 여성 참가자의 유전자와 차이가 크다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유전적 차이가 적은 개체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은 특정 질병에 취약하거나 유전병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과거 근친혼이 횡행했던 유럽 왕실에서 주걱턱이나 혈우병 같은 유전병 시달린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 개체 간 유전적 차이가 클수록 다양한 질병에 저항성을 가진 건강한 자손이 태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이 실험 결과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심지어 땀 냄새만으로도 나와 유전적 차이가 큰 파트너에 끌린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이 실험에 대해 듣게 된 나는 모종의 위기감 같은 걸 느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의 땀 냄새도 좋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운동이 싫다. 숨이 차도록 움직이는 것도 싫고, 땀을 흘리는 것도 싫고, 땀 흘리고 난 뒤의 냄새와 찝찝함은 최악이다. 그렇게 운동과 담쌓고 살다가, 손목 통증으로 찾아간 정형외과에서 당신은 손목보다 척추가 더 심각하니 도수치료를 받아보라고 권유했다. 팔다리가 가끔 저리고 허리도 아팠던 터라 그러기로 했다. 내 담당 물리치료사님은 나보다 서너 살은 어려 보이는 분이셨다. 물리치료사님 내 팔다리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기도 하고 꺾기도 하다가 나에게 말했다.

 “천장 보고 누우셔서 다리 굽혀서 세워보세요.”

 내가 자세를 취하자, 물리치료사님은 본인의 손끝으로 내 복부와 골반을 꾹꾹 누르시더니 감탄했다.

 “와….”

 “왜 그러세요?”

 “근육이… 정말… 하나도 없으시네요!”

 아무래도 좀 그런 편이죠... 머쓱해하는 나에게 물리치료사님은 도수치료도 물론 도움이 되지만, 운동으로 근육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며 운동의 중요성에 대해 한참 설파했다. 아무래도 근육이 0에 수렴하는 인간을 머리털 나고 처음 본 모양이었다. 나를 연구 대상이나 희귀 케이스 정도로 여긴 듯한데, 어쨌든 의욕이 꽤 넘치셔서 내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동작까지 여러 개 가르쳐주셨다. 물론 집에 와서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헤헷…. 도수치료도 대여섯 번 정도 다니다가 이사를 오면서 병원이 멀어져서 진단서를 끊고 실비보험 신청하는 것을 끝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내 체력이 금방 방전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평소에 체력 안배를 잘하는 편이다. 그래서 집 밖에 있을 때는 거의 절전모드를 유지하며 살고 있는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아껴 쓰는데도 배터리 용량이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당연했다. 젊음이라는 무기가 녹슬어 나도 모르는 사이 맨몸으로 세상에 맞서고 있었으니 힘들 수밖에. 원래 다들 아침에 일어나는 게 이렇게 힘든가 했는데 알고 보니 친구들은 벌써 종합비타민을 챙겨 먹고 있었다. 처음으로 영양제를 직구했다. 내 손으로 영양제를 사 먹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러다 영양제만으로 안 되겠구나 싶을 때가 왔다. 이제는 정말 운동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은 더 이상 젊음을 담보로 체력을 가불해 쓸 수가 없었다. 홈트를 시도했다. 당연히 실패했다. 이것은 도무지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다양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스쿼시, 테니스, 필라테스, 클라이밍, PT, 수영, 배드민턴, 심지어 등산까지 있었다.


 내가 고려하는 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운동 초보들이 할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운동이란 걸 고등학교 체육 시간 이후로 해본 적이 없었다. 둘째, 부상 위험이 적어야 했다. 나는 약간만 건강해지고 싶은 거지 운동하다가 다치고 싶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잘하든 못하든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어야 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해야 하는 운동인데 내가 너무 못하는 상황을 나는 못 견딜 게 뻔했다. 게다가 운동모임이 술 모임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게 되는 걸 주변에서 너무 많이 들은 터라 그것도 싫었다. 그렇게 모든 조건을 고려해 필라테스를 하기로 결심했다. 도보 20분 거리의 필라테스 학원에 용기를 내어 상담하러 갔다. 1:1 수업과 6:1 수업을 각 4회씩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한 달에 30만 원이었다. 그래. 일단 운동에 돈을 크게 쓰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미래의 내가 열심히 다니겠지. 큰맘 먹고 일시불로 결제하며 배수진을 쳤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1:1 수업 먼저 네 번 들은 후에 6:1 수업을 듣기로 했다. 강사님과 일정을 잡고 드디어 첫날. 운동용인지 고문용인지 모르겠는 기구들 사이에서 일단 매트를 깔아놓고 운동을 시작했다.

 “다리 90도로 올리고 팔 곧게 뻗어보세요.”

 “… 언제까지 해요?”

 “준비 자세인데요….”

 “네?”

 이미 내 몸은 경운기처럼 덜덜거리는 상태였다. 내 몸뚱이는 뭐랄까, 총체적 난국이었다.


 고백하자면 필라테스는 정적이고 평온운동인 줄만 알았다. 몸에 딱 붙는 운동복을 입고 우아한 동작을 하는, 땀도 별로 안 나고 많이 힘들지 않은 그런 운동. 하지만 평온한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온몸의 근육은 미친 듯이 바들바들 떨 일을 해야 했다. 평온함 속에 감춰진 치열함을 몸으로 체감하자 갑자기 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 여기가 아픈데요…”

 “거기… 가 아프시면 안 되는데…? 이쪽 근육이 없어서 그쪽 힘을 쓰고 계시는 거예요. 배에 힘주세요.”

 “회원님! 숨 쉬세요! 호흡하셔야 해요!”

 나도 누구보다 그러고 싶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저분이 강사님 구조대원인지 헷갈다. 언제 끝나나 싶어서 시계를 봤는데 20분밖에 안 지났다. 아직도 30분이 남았다고? 의심이 들었다. 필라테스학원 안에 어 거대한 중력이 작용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 아닐까. 어쨌든 50분이 지나갔고, 이틀 뒤에 다시 오기로 일정을 잡았다.


 1:1 운동 2일 차. 오늘은 리포머라는 기구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하체운동을 하면 토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수업이 20분쯤 남았을 때 뭔가를 더 시도하려는 강사님께 내가 말했다.

 “선생님… 여기서 더하면 제가 집에 네발로 가야 할 거 같아요.”

 내 말에 강사님도 웃고 나도 웃었다. 근데 웃다 보니 웃을 일이 아니었다.

집에 어떻게 가지?

 하체 운동이 아닌 다른 운동을 하며 남은 20분이 지났다. 옷을 갈아입고(이때부터 느낌이 이상했다)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웬걸. 스쿼트와 런지로 조져진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똑바로 설 힘도 없어서 흐느적거리는 몸뚱이를 이끌고 집까지 이족보행으로 갈 수 있을까? 도보 20분 거리에서 나는 버스를 기다릴지 택시를 잡아탈지 고민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이내 걷기 시작했다. 마치 방금 태어나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새끼 기린이 된 것 같았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아, 이렇게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웃겼다. 횡단보도에 도착하기 다섯 걸음 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보통 성격 급한 나는 뛰어서 건너는데 그 다섯 걸음을 뛸 힘이 없었다. 파란 신호가 깜빡이는 동안 횡단보도를 건널 엄두가 나지 않아, 점멸하는 신호등 앞에서 나는 얌전히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사진: UnsplashJunseong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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