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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Dec 11. 2023

애증의 짝사랑, 피아노(2)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영원

 그러나 인터넷의 엄청난 발달은 한 직장인이 방구석에서 취미 생활을 하는데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덕분에 나는 퇴근하고 피아노 학원에 가지 않아도 동영상으로, 심지어 무료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악보를 다시 읽을 수 있도록 기초 이론부터 다시 시작했다. 엄지손가락은 1번이고 새끼손가락은 5번. 높은음자리표의 ‘라’가 낮은음자리표에서는 ‘도’. 반음 올려서 연주하는 #(샤프)는 조표에 파도솔레라미시 순서로 붙는데, 반음 내려서 연주하는 ♭(플랫)은 시미라레솔도파 순서로 붙으며 #과 반대라는 것. 4분의 3박자와 8분의 6박자는 약분하면 똑같은데 뭐가 다른 건지. 음악 이론을 다시 배우고 있으니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비록 손가락의 움직임은 어린 시절만 못하더라도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있으니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피아노는,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인 악기였다.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제곡 Secret은 초심자로 회귀한 내가 곧장 치기엔 무리여서, 쉬운 곡부터 차근차근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고른 곡은 영화 <올드보이>의 주제곡 The Last Waltz. 이번에도 왈츠였다. 내가 꽂히는 노래들은 어쩐지 모두 4분의 3박자였다. 심지어 그다음으로 선택한 연습곡인 에피톤 프로젝트의 봄날, 벚꽃, 그리고 너 역시 그랬다. 이때 알았다. 나 4분의 3박자 좋아하는구나! 쿵 짝짝 쿵 짝짝. 심장 박동을 닮은 그 박자를 듣고 있으면 왠지 마음에 안정감이 생겼다. 그래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주인공들이 왈츠의 쿵 짝짝 쿵 짝짝하는 리듬에 맞춰 회전문을 통과한 걸까. 나는 뮤지컬에서 주인공들이 왈츠를 추는 장면 역시 굉장히 좋아한다. 주인공들이 왈츠를 추는 게 대부분 로맨틱한 장면인 드라마와 다르게, 뮤지컬에서의 왈츠는 곧 벌어질 불행한 사건이나 결말을 암시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왈츠를 추고 있으면 ‘아, 이거 좀 있으면 파국이겠군.’ 하며 지켜보게 된다. 그렇지만, 다가오는 비극 앞에서 춤을 추고 있는 두 사람…. 재미있지 않나요? 아무튼, 그 후에도 히사이시 조의 인생의 회전목마, 쇼팽의 마주르카, 사의 찬미의 원곡인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강의 잔물결까지, 나의 4분의 3박자 사랑은 계속 진행 중이다.


 유튜브 피아노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다시 피아노 의자에 앉은 나는 몇 주간의 연습 끝에 매끄럽지는 않아도 뜨문뜨문 얼렁뚱땅 Secret을 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만약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고 이 속도로 피아노를 쳤으면 아마 원하는 시간으로 이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 5분 전으로나 돌아갈 수 있었을까. 아니면 수많은 미스터치들로 인해 시공간을 표류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왼손과 오른손을 바꿔서 치는 부분을 드디어 내 손으로 직접 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한동안 굉장한 성취감에 취해 있었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한창 인기일 때, 주인공들의 밴드 합주 장면을 인상 깊게 본 친구 하나가 나중에 우리도 같이 이런 거 하면 재밌겠다고 말했다. 물론 이 아이디어는 나한테 키보드 시키고 다들 노래할 생각만 해서 기각되었다. 박치 키보드 연주자와 보컬만 세 명인 밴드라니. 밴드 이름은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는 밴드’가 되려나, 하하. 농담처럼 말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합주를 해보고 싶기는 하다. 각자의 속도대로 연주하던 사람들이 서로의 속도에 맞춰가며 함께 음악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항상 심장이 두근거다. 그렇게 함께 연주하다 보면 서로가 타인의 삶의 속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도 든다.


 내가 처음으로 클래식 음악의 아름다움과 힘을 느끼게 된 것 역시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었다. 몇 년 전의 나에게는 어떠한 생산적인 취미도 할 기력이 없던 시기가 있었다. 회사도 싫고, 사람도 싫고, 살기도 싫고,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던 시절. 그리고 그날 역시 힘들었던 수많은 보통의 하루였다. 차이가 있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정말 우연히,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의 선택으로 조성진이 연주한 드뷔시의 달빛과 베토벤의 비창 2악장을 듣게 됐다는 점. 그날 나는 내가 그렇게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당시 클래식 음악이라고는 전혀 듣지 않았던 나에게 어떻게 알고리즘이 이 음악을 건넸는지. 나는 이전까지 클래식 음악 하면 어렵다, 재미없다, 길다, 지루하다 같은 부정적인 수식어를 먼저 떠올렸다. 그래서 지레 겁을 먹고 피해 다녔는데, 클래식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찾아와 조용히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전하고 갔다. 그 낯설고도 따뜻한 손길에 눈물을 한 바가지 쏟고 난 뒤로 나는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지속되는 기분이 들 때마다 클래식 음악을 찾아 듣게 되었다. 비록 내 손으로 연주하지는 못해도, 내리는 비를 피해 처마 아래에 들어가는 기분으로 클래식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씩 고요해졌다.


 전에 들었던 한 강연에서 강연자였던 작곡가님이 이런 일화를 이야기하신 적이 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지금 피아노를 시작하면 늦을까요?”하고 물어보시는데, 그러면 “네.”라고 대답하신다고 했다. 취미로는 가능하나 늦은 나이에 배우기에는 피아노보다 아코디언을 추천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배움에는 나이가 없지만 나이가 들수록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 필요한 시간이 점점 길어지는 건 사실이다. 피아노와 두 번이나 헤어졌다가 세 번째 다시 만난 내 경험으로 미루어봤을 때는 그랬다. 근데 뭐, 내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배우겠다는데, 늦으면 어떻고 오래 걸리면 또 어떤가. 누구 말마따나 이제 와서 시작하기에 늦은 건 키즈 모델밖에 없고, 오늘은 우리의 남은 인생 중에 가장 젊은 날인 것을.


 지금도 여전히 나는 피아노를 친다. 물론 매일 연주하지는 않고, 어떤 때에는 악기보다 선반처럼 사용할 때도 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데 만약 어릴 때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본다. 함께 지낸 시간 동안 미운 정이라도 들었을지, 아니면 더 힘들고 구질구질하게 헤어졌을지. 그러고 보면 피아노만큼 나에게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하는 악기는 없었다. 도망치고 싶었고, 함께하고 싶었고, 울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었고, 같이 있으면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가게 하고, 우연히 찾아와 운명 같은 위로를 전하던 너에게 느꼈던 이 마음들을 과연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연주하는 것은 그곳에 있는 작은 개인이고, 손끝에서 태어나는 것은 매 순간 사라지는 음표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는 영원과 거의 같은 의미의 존재가 있다.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동물이 영원을 자아내는 경이로움. 그 자리에만 국한된 덧없는 일과성의 존재, 음악을 통해 우리는 영원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온다 리쿠, <꿀벌과 천둥> 중에서-


 온다 리쿠의 장편소설 <꿀벌과 천둥>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오늘의 일기를 맺으려 한다.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영원. 나는 항상 영원이 허무와 맞닿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종류의 영원이라면 오히려 충만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피아노의 곁을 맴돌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피아노를 배우며 알게 된 점

억지로 시킨다고 능사가 아니다.

맨날 피아노 학원을 탈주하던 내가 알고 보니 상대음감? 근데 이제 박치를 곁들인.

배움에는 나이가 없지만, 배우는 시기는 빠를수록 좋다.


피아노, 이런 분들께 추천합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 분

피아노와 접근성이 좋은 분

따로 또 같이할 수 있는 악기를 배우고 싶은 분

꾸준하고 성실하신 분



사진: UnsplashCaleb M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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