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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원 Dec 04. 2023

애증의 짝사랑, 피아노(1)

잃어버린 초심, 그리고 세 번째 첫 만남

 우리는 어떤 일을 할 때 ‘초심을 잃지 말자’ 혹은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격언처럼 사용한다. 타성에 빠지지 않고 처음에 먹은 마음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그런데 나에게 초심도 잃고 실력까지 잃어버려 다시 시작할 때마다 매번 초심자로 돌아가 버리는 취미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피아노다. 몇십 년 만에 타도 문제없을 것 같은 자전거와 달리, 피아노는 손을 놓는 순간부터 점점 흐릿해지면서 이내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따져보면 자전거보다 피아노를 배운 시간이 한참 긴데도 말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우리의 첫 만남이 단순히 호감 때문이 아니라 부모님이 정해주신 대로 이루어져서였을까. 피아노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당시 피아노 학원은 꾸준히 다니는 아이들은 없어도 누구나 한 번씩은 거쳐 가는 관문 같은 곳이었다. 엄마 손에 이끌려 간 피아노 학원은 왠지 모르게 닭장을 떠오르게 했다. 한 평도 안 될 듯한 좁은 방에서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안 그래도 좁은 방을 더 비좁게 만드는 덩치만 큰 이 녀석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게다가 달걀을 쥔 것 같은 손 모양으로, 손목은 떨어지지 않게, 허리를 세우고 재미없는 곡을 반복해서 뚱땅거리는 건 별명이 원숭이였던 나 같은 아이에게는 거의 고문이었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의 연습실에는 방마다 커다란 창문이 있었는데, 그 창은 외부가 아니라 건물 내부의 복도로 나 있었다. 선생님이 다른 친구들을 지도하러 가시면,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세 소녀는 종종 그렇게 땡땡이를 쳤다. 어쩌면 엄마는 나를 클래식 피아노가 아니라 클라이밍 학원에 보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 시절 공주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여자아이들의 로망이었던 반짝이는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대회에도 나갔지만, 그럼에도 녀석이 좋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한 거다. 아무튼, 나는 어려서부터 효율성을 추구했던지라 피아노를 칠 때면 어떻게 해야 더 잘 칠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열 번 다 안치고도 열 번 친 것처럼 보일지만 궁리했다. 불행히도 그런 게 있을 리 없었고, 나는 아이들의 거짓말이 어른들 눈에 빤히 보인다는 걸 알기엔 너무 어렸다. 내가 ‘너 오늘 왜 피아노학원 안 갔어?’라는 엄마의 유도 신문에 세 번쯤 걸렸을 때 엄마는 드디어 나를 포기했고, 나는 더 이상 억지로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지 않아도 됐다.


 피아노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갑자기 음악 수행평가로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악기를 연주해야 했다. 내가 그나마 최근에 다뤄본 악기는 플라스틱 리코더와 단소뿐이었는데, 내 폐활량은 관악기를 연주하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탬버린이나 트라이앵글을 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찰나에 음악실 한쪽에 놓인 피아노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비록 우리의 첫 만남이 별로였고 헤어질 때도 구질구질했지만 어릴 적에 함께한 추억이 있잖아? 곧장 집 근처 음악학원에 등록해 일주일 정도 배우고 수행평가를 보기로 했다. 내가 선택한 곡은 Brian Crain의 butterfly Waltz. 초보자들이 치기 어렵지 않고 멜로디도 좋은 곡이었다. 피아노 학원에 간다고 야자시간을 합법적으로 빠져나오는 기분도 썩 나쁘지 않았다. 헤어진 지 7~8년쯤 되었지만 그래도 음악 시간에 배운 기초지식 덕분에 피아노를 다시 알아가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행평가 점수도 잘 받았다. 이렇게 비즈니스적이었던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온전히 내 필요에 의한 만남이었지만, 그만큼 시작도 이별도 아주 깔끔했다.


 피아노와 또다시 만났을 때, 나는 2년 차 직장인이었다. 혼자 살면서 습관처럼 틀어놓은 TV에서 오래전에 본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나왔다. 문득, 다시 피아노가 치고 싶어졌다. 이제 와서 피아노 배틀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시간여행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OST인 Secret이 오랜만에 들어도 너무 좋았고, 무엇보다 왼손과 오른손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치는 부분이 다시 봐도 끝내주게 멋있었다. 당시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왠지 모르게 항상 화가 나 있었고, 내가 이렇게 힘들게 돈 버는데 20만 원짜리 디지털피아노 정도는 나에게 일시불로 선물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자 어느새 내 손가락은 냅다 결제 버튼을 눌러버렸다. 월세방에 낑낑대며 들여놓은 88 건반 디지털 피아노는 헤드셋을 쓰고 치면 되니 층간소음도 걱정 없었다. 함께 구입한 X자 스탠드 위에 올려놓고 전원을 연결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건반들에 마음이 설렜다. 그게 당황스러움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고등 교육 이후로 음악 수업을 들은 적 없는 나는 그새 악보 보는 법을 다 잊어버렸고, 알고 보니 내가 박치였으며, 무엇보다 내 왼손은 이제 완전히 먹통이 되어있었다.



사진: UnsplashEbuen Clemente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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