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 없는 동화
영이는 집에서 달팽이를 키웠다. 그 친구에게 적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느릿느릿 말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운 달팽이를 지켜보는 것은 영이에게 큰 위안에 되었다. 더군다나 화장실에 가는 법을 잊은 영이에게 상추를 먹으면 초록똥을 싸고, 당근을 먹으면 주황똥, 파프리카를 먹으면 노란똥을 싸는 뱃속이 누구보다 투명한 달팽이의 배설활동은 커다란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수고롭고 때로 영이에게 고통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배변과정을 직접 겪을 필요 없도록 하는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의 관전이 주는 매력. 형형색색의 먹이를 준비해놓고 달팽이가 이번엔 이걸 먹고 어떤 색깔 똥을 만들어낼까를 상상하고 예측해보는 건 영이에게 주어진 시간을 재미있게 흘려보내는 즐거운 취미활동이었다.
그 날 밤 영이는 꿈을 꿨다. 먹기 싫은 음식을 안 먹는 꿈. 엄마가 새벽같이 정성스레 갈아 자신의 코 앞에 들이민 알싸한 냄새와 쓰디쓴 맛이 나는 녹즙을 변기에 미련 없이 쏟아붓고 아무런 죄책감 없이 돌아서는 꿈. 한겨울 영이네 집 황량한 식탁을 거대한 돌탑처럼 수호하는 귤무더기를 깨끗이 해치우지 않는 꿈. 한껏 부풀어올라 딱딱하게 뭉친 영이의 묵직한 아랫배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모든 건 정말이지 꿈결처럼 자연스러웠다. 영이는 꿈에서 깨고싶지 않았다.
엄마가 영이를 흔들어 깨우려 시도한다. 오늘도 걱정스런 목소리로 다그치듯 묻는다. 언제 화장실에 다녀왔냐고. 혹시 지난 번처럼 커다란 똥을 싸서 또 변기가 막히거나 역류한 건 아니냐고. 오줌은 잘 누냐고. 예전에 보니 오줌발이 약해진 것 같은데 조만간 의사선생님께 꼭 물어봐야할 것 같다고. 영이는 사려깊어 보이지만 자신이 집중하려는 일상과 관심사에서 한참 벗어난 엄마의 원치 않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꿈을 꾼다. 기어코 제자리로 돌아가고마는 대화의 화제를 시치미 뚝 떼고 전환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