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우소 Oct 23. 2023

라이프 오브 어스

퇴로는 없다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을 때는 상상력이 꼭 필요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가도 애써 재미있는 생각을 하면 돌고래가 바다에서 튀어 오르듯 감정이 순간 살아나는 걸 느낀다. 배꼽 빠지게 웃긴 개그맨들의 상당수가 매우 어렵고 불행한 유년시절을 회상한다. 지독하게 가난했다던지, 사생아로 태어나 부모 얼굴도 모른다던지, 가정폭력을 겪었다던지…


같은 책도 다시 읽으면 그 느낌이 다른 것처럼, 나는 아이를 낳고 내 유년시절을 자연스럽게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당시 느꼈던 불편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반복해서 마주하며 그것들이 무엇인지 하나하나 정확하게 짚어내는 동안 점차 심연으로 가라앉는 나를 발견했다. 아마 산후우울증도 있었겠지 싶다.


이 즈음에 소통전문가라는 김창옥 강사의 강연을 즐겨보게 되었다. 불화가 심한 부모님과 살아온 유년시절, 아버지의 선천적 장애, 가정폭력과 도박문제 등을 유머러스하게 은유적으로 표현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공감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같은 상황을 겪어도 바라보는 시각을 달리 하면 내가 행복할지 불행할지는 직접 선택할 수 있겠구나라는 희망을 얻었다.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감명깊게 읽었던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책이 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 가족은 동물들을 싣고 이민을 가던 중 거센 폭풍우를 만난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뒤섞여 표류하다 배고픔에 허덕이던 동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와중에 파이는 발밑에 숨어있던 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발견하게되고 그와 함께 죽기 직전 육지에 다다른다.


이후 해당 사건 경위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에게 파이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지만 그들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없어 했다. 그러자 파이는 이전 이야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그와 함께 표류하던 건 사람들이었다. 야만적인 주방장, 다친 선원, 엄마, 그리고 살기 위해 맹수의 본성을 이끌어내야했던 파이. 리처드 파커는 파이 자신이었던 것이다.


파이는 그 과정에서 큰 좌절과 슬픔, 두려움과 분노, 원망과 희망 등 복잡한 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누구에게도 말하기 싫고 꺼내기 어려운 사건,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배가 침몰하고 가족을 눈앞에서 모두 잃었으며 손바닥만한 구명보트 위에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지옥을 경험해야했던 파이는 극심한 외로움, 상실감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채 살아남아 그 모든 것을 녹여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경험을 재해석함으로써 자신을 용서하고 격려하며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를 낳고 첫 육아를 시작하다 과거 어떤 지점의 안개가 걷히며 내가 그 당시를 이제서야 바로 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가족을 미워하고 자잘한 사건들을 일일이 회상하며 사실여부를 따지느라 온 신경이 곤두섰을 때가 있었다. 그 때 엄마랑 정말 많이 싸웠다. 아니 온 가족과. 엄마는 어쩜 그렇게 나 어릴 적엔 모든 일에 내내 모른다, 관심없다, 그런거 아무 의미없다, 나랑 상관없다며 무심함을 넘어 방치하는 태도로 일관하다 성인이 된 내가 그 시절 얘길 손톱만큼이라도 할라치면 정확히 반대의 무언가를 사실이라고 주장하거나 급기야 우리집 젖병 갯수까지 자신이 똑똑히 알고있고 아기엄마인 내가 잘 모른다고 우겨서 정말 울화통이 터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나 다른 가족들도 나만큼 많이 아팠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나온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긴 힘이 들어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적어도 엄마라면 내가 아팠던 것을 헤아려주길 바란다는 욕심이 계속 있었나보다. 당시엔 상대가 알아준다면 묵은 상처가 치유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와 희망을 거둔 지금, 내가 겪어온 과정을 소화시킬 수 있을 만 한 음식으로 요리하는 건 스스로의 몫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실인지 거짓인지 또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게 뭐가 중요할까? 결국은 각자의 편에서 믿는 것이 그들에게는 진실이고 올바름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다른나라 말을 해대며 평행선을 달려왔다. 함께 아팠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모두가 소화시킬 수 있는 건강한 요리로 우리 중 누구라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어쩌면 지금도 모두가 가족이란 이름으로 웃으며 만나왔을 지 모른다.


비단 내 가족만의 경우일까? 세상의 모든 대립과 분쟁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필요한건 적나라하고 잔인한 폐부를 찌르는 팩트가 아니라 유쾌하거나 감동을 줄 수 있는 은유적 서사인지도 모른다. 허무맹랑한 환타지라 해도. 사죄하고 용서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며 과거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고 함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길 바란다는 진심만 서로 같다면.


작가의 이전글 예술이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