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고했다, 고생했다, 이 한마디면 되는데

by 해야리

정신과에 방문할 때마다 의사선생님이 빼놓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그게 바로 화병이에요. 쉬어야 해요.

그럼 나는 의사선생님께 말한다.

쉬어도 쉬는 느낌이 안나요. TV를 봐도, 여행을 가도, 친구와 수다를 떨어도... 제 머릿속은 너무 많은 생각들로 터져버릴 것 같아요.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하루 푹- 쉬고나면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와요. 너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너한테 이럴 여유가 있다고 생각해? 결국, 쉬면 더 괴로워지는 거죠.


아니, 애초에 쉬는 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였죠?


화병... 40-50대 어른들이 많이 걸리는 병인 줄 알았던 그 병이 나에게 찾아오다니.

뭐가 그렇게 화가 났을까. 뭐가 그렇게 용서가 안됐을까.


***


일은 안하면서 나에게 소리나 빽빽 질러대던 그 과장놈은 연말에 상을 받는다.

바보처럼 죽어라 일만 하다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린 나는 챙겨주는 사람 하나 없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이 조직의 고장난 부품이 된 것만 같다.


공기업이라는 조직 자체가 그렇듯, 소위 '일 안하는 분위기'는 스멀스멀 전염병처럼 번져간다.

일해봤자 뭐, 인정해주지도 않는데.

일해봤자 뭐, 결국 정치 잘하는 사람이 승자인데.

일해봤자 뭐, 수고했다, 고생했다, 한마디 해주는 사람 없는데.


일 열심히 해봤자 다 의미없어.


직원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 내가 너무나 싫어했던 말이었는데, 요즘들어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


그동안 인사이동이 있었다. 나는 다른 팀으로 가게 되었다.

거의 반년만에 팀장님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이 인간과의 내 인생 마지막 식사가 될 것 같다.


어색한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보려고 차 안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팀장님은 갑자기 음악을 크게 틀었다.

"이 노래 들어봤어? 내가 작곡한 노래야."

듣고싶지 않았다. 사실 너의 이야기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팀장은 내가 아프고, 대학병원을 가고, 인사팀에 진단서를 제출하고, 다른 팀으로 인사발령이 났지만, 여전히 내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알지 못한다. 병명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다른 팀에서 "그 직원, 어디가 그렇게 아픈거래?"라고 하면... "위... 위경련?"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해댄다. 위경련은 그저 열 가지가 넘는 증상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몇번을 말해도 기억하지 못한다. 관심도 없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면, 내가 팀장이라면, 그동안 고생했다 한마디 정도는 해줄 것 같다.

건강 잘 챙겨라, 가서도 잘 적응해라, 잘 지내라... 최소한 그정도는 해줬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은 모든 관심과 집중이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자기가 오랫동안 데리고 있던 직원이 나가던 말던.


진정한 나르시스트이자 소시오패스.


***


자리이동을 위해 모니터를 닦고, 짐을 싸고, 컴퓨터를 해체하고 있는데 영수증 하나를 툭 던져준다.

"이거 하나만 처리해줘."

내일 당장 자리 이동인데, 오후 5시에 밥먹은 영수증을 주다니. 재무팀도 오늘 회계 마감했는데 도대체 어쩌라는 거지.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다. 그리고 이 업무는 엄밀히 말해 내 업무도 아닌데.

"너무 늦게 주셔서 처리가 안돼요. 재무팀 마감했어요."

나는 받은 영수증을 그대로 돌려드렸다. 평소같았으면 어떻게 처리할지 방법을 고민하고 재무팀에 협조를 구했을 텐데, 그럴 에너지조차 없었다.


다른 팀에서 자료요청이 오거나 업무 관련 문의가 들어오면 습관처럼 나를 찾는다. 그럴때마다 내 마음은 말한다. 너, 그거 할 필요 없어. 니 업무도 아니잖아. 너가 여태껏 최선을 다해 함께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했는데, 저 사람이 너에게 수고했다, 고생많았다 말 한 마디 해준 적 있어? 없잖아.


나도 몰랐는데, 나는 거절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


이 회사의 분위기 자체가 그러니, 새로운 부서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이 없다.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 한마디면 되는데. 그게 어렵나?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걸까.


다 잊고 긴긴 잠을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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