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

by 해야리

이상하게도 늘 힘든 일들은 한꺼번에 찾아왔다.

사람이 떠나는 일도,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도 그랬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이유였던, 삶에 대한 의지를 유일하게 불어넣었던 그 애와 이별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게 됐다. 그 애와의 만남은 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기도 했지만 가장 큰 불안을 주기도 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한 날들이 길어서인지, 그 애는 점점 내 이야기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A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애는 B, C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식성부터 취향까지 우리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그 애는 산을 좋아했고 나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 애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좋아했고 나는 진지한 상담 프로그램을 좋아했다. 그 애는 고기를 좋아했고 나는 해산물을 좋아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이렇게 정반대인데 애초에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 애는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 애가 아프다는 이유로 거의 대부분의 데이트는 그 애가 사는 동네에서 했다. 나는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 가량 운전을 해가며 그 애를 만났다. 그 애가 내가 사는 곳으로 오다가 혹시라도 몸이 힘들어져서 쓰러지면 어쩌나 하는 노심초사의 마음이었다. 그 애는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었으니까. 언제나처럼, 나는 남을 배려하고 나를 갈아넣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 애를 만나러 갈 때마다 내 몸은 녹초가 됐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고, 운전 때문에 긴장했던 몸이 욱씬거렸다. 그날도 그랬다. 우울증 약까지 먹은 상태여서 너무 피곤하고 졸렸다.


오늘 뭐 먹을래? 고기먹을까? 아니면 회? 밥? 뷔페?

- 뷔페는 좋긴 한데 너무 비싸.


나는 차를 돌려 뷔페로 갔다. 직장인인 내가 사면 되니까.


나는 밥먹는 내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식곤증과 약기운이 한꺼번에 몰려와 밥을 먹다가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았다. 그 애는 밥을 먹는 동안 저녁을 먹고 안경을 보러 가자고 했다. 안경이 너무 낡았다고 했다. 난 숙소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결국 그 애를 따라갔다.


안경사는 여러가지 브랜드의 다양한 제품들을 보여주면서 하나하나 참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그 친절마저 나에게는 피곤함이었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정말 쉬고 싶다.


그 애는 결국 안경을 사지 않았고, 우리는 숙소로 향했다.


넷플릭스 채널을 고르는 것도 곤혹이었다. 우리는 취향이 1부터 10까지 달랐다.


나 OOO 보고 싶어.


그 애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결국 자기가 원하는 드라마를 보자고 제안했다. 어차피 내가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말해도 본인이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보자고 설득할 것 같았다. 운전때문에 녹초가 되어서 채널 고르는 걸로 에너지를 더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러자고 했다.


숙소는 우리가 평소 가던 곳과 너무 다르게 낡고 허름했다. 그 애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면서 그 애가 보내준 리스트를 보고 급하게 고른 곳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워두고 급하게 결제를 했는데, 그 애는 그 방이 마음에 안드는지 계속 불평을 해댔다. 냉장고에 물이 새. 창문 위치가 이상해. 먼지가 너무 많아. 천정이 너무 낮아. 옷걸이가 없어... 평소에 알러지가 심하던 그 애는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그 애의 건강이 또 걱정되었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해... 제발 그만해... 질리니까.


그 애가 아픈 것도 기다릴 수 있었다. 공무원이었던 그 애가 백수가 된 것도 괜찮았다. 매번 데이트비용을 대부분 내가 내는 것도 괜찮았다. 그 애가 살이 쪄도 괜찮았다. 다 괜찮았다.


근데 오늘만은... 오늘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아프잖아. 나도 병원다니는데. 그런데도 너보러 왔잖아. 저녁도, 숙소비용도 전부다 내가 냈잖아. 저 멀리서 운전해서 여기까지 왔잖아. 이렇게까지 노력했는데도 이러는 거야?


그 애는 본인이 원하는 드라마를 켜고는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면서 봤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고싶지 않았다. 너무 많이 봤던 드라마였기 때문에 이미 스토리를 다 알고 있었다.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긴긴 잠을 자고 싶다.


피곤해서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나는 수면제를 입에 털어넣었다. 정말 긴긴 잠을 잤다. 체크아웃 시간이 거의 다되어서 깼다. 그래. 집으로 가자. 편안하지도 않고 아무도 나를 반기지 않지만, 그래도 내 한 몸 누일 수 있는 집으로.


그 애는 차에서도 내 이야기를 뚝뚝 끊었다. 내가 A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저기 간판 좀 봐, 저기 스타벅스가 생겼네, 저기 어릴때 내가 다니던 학교였는데... 와 같은 말로 대화흐름을 끊었다.


사람에게 많이 버림받아본 사람은, 사람을 많이 버려본 사람은, 본능적으로 안다. 서로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서로의 대화에 귀기울이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지 않기 시작할 때가 바로 헤어질 순간이라는 사실을.


나만 놓으면 끝나는 관계라는 것도 오랫동안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그 애가 나와 헤어져도 아프지 않을 순간을 최선을 다해 기다리고 있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순간이 왔다.


나는 차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애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분 안좋은 일 있어? 내가 잘못한 거 있어? 왜 아무 말도 안해?

- 니가 내 이야기에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운전에 집중하고 싶어.

아. 내가 잘못했네. 운전할때 방해 안할게요. 근데 혹시 내가 잘못한 거 있으면 말해줘요.


똑같은 레퍼토리.


나는 그 애를 내려주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었다. 차가 밀려도 너무 심하게 밀렸다. 거의 2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엉엉 울었다. 내가 가장 힘든 순간 별처럼 찾아온 사람.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 힘을 주던 사람. 너무 많은 추억을 함께 공유한 사람.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지만 모든 걸 해준 사람.


정말 아플땐, 이렇게 아플 땐, 나도 챙김받고 싶다. 가족도, 회사사람들도, 연인도... 왜 세상엔 내가 챙겨야 하는 사람들만 있는지 모르겠다. 태우러 가야하는 사람이 아니라, 집 앞에 나를 태우러 오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날 데려다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 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 애는 혹시 본인이 잘못한게 있냐고 물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번 데이트에서 니가 날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못받았는데... 우리가 자주 만나고, 넌 우리가 함께하는 순간을 점점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 그래. 자주 만나서 그렇다는 거지? 그래 당분간 연락 안할게. 몇 개월 뒤에 할게.


그 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결된 그 애와의 마음의 끈도 댕강 끊겨버렸다.


그 애는 미안하다고 계속 카톡을 보냈다. 눈물을 겨우 참고 통화를 했는데 그 애는 평소와 달랐다. 니가 말하지 않는데 니 마음을 어떻게 아냐며 심한 말을 퍼부어댔다. 그 애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마음에 꽂혔다. 그리고 이제 진짜 정리해야 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애는 본인이 지금 가진게 너무 없어서, 내가 떠날까봐, 두려워서 그랬다고 했다.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내가 그 애를 좋아했던 가장 큰 이유는, 갈등을 늘 어른스럽게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애는 지금 어린 아이처럼 불안정하게 떼를 쓰고 있다. 우리 엄마와 같은 방식으로.


나는 그렇게 헤어질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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