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고속도로 운전을 두려워하셨다.
불의의 사고로 건강을 잃고, 안정된 직장을 잃고, IMF까지 직격탄으로 맞아버리면서
불안장애와 알콜중독으로 가족들을 고통속에 몰아넣었다.
아빠는 가족들이 먼 곳으로 가야할 때면 꼭 터미널까지 나와 배웅했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에서조차 두려움이 읽혔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가 사는 지역 밖으로 나가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섬은 아니었으나 분명 고립된, 섬같은 곳이었다.
이런 내가 누구나 들으면 바로 아는 공기업에서, 여행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
안정된 직장에 취직을 하고난 후 갖게된 나의 가장 큰 목표는
매년 부모님을 좋은 곳에 여행보내드리는 거였다.
서툴지만 운전을 시작했고, 일을 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가장 좋은 호텔, 가장 유명한 맛집,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아빠는 딸내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여행을 갈때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셨다.
***
포항 영일만항에서 23시 50분에 출발하는 크루즈선을 타고 울릉도로 향했다.
울릉도는 아빠의 평생 버킷리스트였다.
여행업계에서 일은 하지만 울릉도는 나도 처음이다.
나름 좋은 호텔도 예약하고, 맛집도 알아보고, 차도 렌트했다.
멀미약을 미리 먹었는데도 아빠는 배멀미를 했다.
하지만 나는 꿀렁꿀렁 움직이는 크고작은 파랑이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반년간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는데, 이상하게 모든 것을 잊고 푹 잤던 것 같다.
바다가 두팔벌려 나를 꼬옥 안아주는 것 같았다.
***
새벽 6시 40분에 울릉도 사동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릴 시간이 되자 렌트카 업체 직원분께 연락이 왔다.
안전을 위해 각 층별로 시간대를 나누어 배에서 내리라는 안내방송이 나왔고
우리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흐림'이었는데, 창밖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비 맞으면 안되는데...'
주차장에서 렌트카를 빨리 찾아 부모님이 최대한 비를 맞지 않게 하겠다는 요량으로
배에서 내리자마자 먼저 렌트카를 찾으러 달려갔다.
"아빠! 어디야?"
"매점! 카페도 있고!"
"상호가 정확히 뭔데?"
뚝-
나도 울릉도가 처음이라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계속 매점과 카페만 외치는 아빠가 답답했다.
결국 렌트카 사장님이 만날 장소를 정해주었고
셋다 비를 쫄딱 맞은 채 차에 탔다.
"나도 여기가 처음인데 상호를 말해줘야지. 계속 매점, 카페라고만 말하면 어떡해. 카페가 한두개도 아니잖아"
"에이씨.. 다젖었네. 너는 비가 온다고 하면 우산을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일기예보에서는 흐리다고만 했어."
"너는 그게 문제야. 너는 스스로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준비 안하고."
"나보고 날씨마저 예측하라는 거야? 내가 신이야?"
이 말을 하면서 갑자기 서운한 감정이 몰려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하... 회사도, 가족도, 다들 나한테 바라는 것만 많네."
"회사 어떻게 다니고 있을지 안봐도 뻔하다. 분명 회사에서도 너 인정 안해줄거야. 한심해가지곤."
"나 지난번 근무평가 1등했는데? 건강도 다 망가질 정도로 일해서... 지금 이렇게 병이 나서 대학병원 다니잖아."
"니가 이런거 하나하나 안챙기고 엉망으로 하니까, 매번 니가 하는 일들이 다 안풀리는 거야."
"도대체 안풀리긴 뭐가 안풀렸다는 거야?"
"서른이 넘어서 부모 집에 얹혀 사는 자식이 어딨어? 남들은 다 결혼하고 나가던데, 너는 부모집에 얹혀 사는 주제에 여행 몇번 보내주면서 효도했다, 자기만족하는거지?"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해?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야?"
"너 주말마다 누워만 있고. 그런식으로 살면 회사에서도 성공못해."
"이제 아픈것까지 비난하는거야? 내 진단서 봤잖아. 아빠 눈으로 봤잖아! 나 아파! 아프다고!"
"회사에서도 분명 다들 한심하게 볼거야."
제발.. 제발 그만해... 제발.
"어떻게 일하고 있을지 안봐도 뻔하다."
"아빠가 뭘 알아? 내 밑에 후배들? 전부다 빽이야. 아빠가 도의원이고, 의사고, 시청 고위직 딸이고, 유명한 기자고. 팀장? 임원? 다들 그런 자식들은 안건드려. 나같이 빽없고 힘없는 애들한테나 러브샷 강요하고 노래방에서 춤을 추자는둥 개소리를 하지. 그런거 안해서 내 직장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졌잖아. 내가 말을 못해서 안하는 줄 알아? 그래. 나 불행한거 다 아빠때문이야. 아빠가 힘만 좀 있었어도..."
"그래서 내가 예전에 잘나갈때 나한테 굽신거렸다는 그놈 식사자리 마련하라고 한거잖아."
"아빠 모르지? 그 사람 지난번에 아빠 봤을때 분명 아빠 기억했어. 기억 못하는 척 한거지. 그 사람 나 얼마나 무시하는지 알아? 왜 아빠는 경비원이야? 왜왜? 왜 군대 그만두고 젊은날 아무것도 안했어?"
"나는 교통사고로... 장애가 있어!"
"장애 판정을 받은 것도 아니잖아. 이가 부러진게 왜 장애야! 어째서 장애냐고! 그냥 사고 핑계대면서, 젊은날부터 경비원같은 편한일 하면서 현실에 안주한 거잖아. 사지가 멀쩡한데 나라면 뭐라도 했어. 가족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내가 그렇다고 못해준게 뭐있어? 남들 할거 다해줬구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좋은 고등학교 들어갔는데도 돈없다고 학원, 과외 하나 제대로 안보내줬잖아. 대학교 가서는 원룸 하나 못구해줘서 고시원 생활하게 만들고."
"니가 처음부터 좋은 대학을 똑바로 잘 들어가고 기숙사생활 했으면 고시원 생활을 왜해?"
"편입생이 어떻게 기숙사를 들어가! 남들 다가는 어학연수, 교환학생 한번 안보내주고. 아빤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지? 돈도 스펙이야. 부모 직업도 스펙이고. 면접만 가면 매번 해외경험있냐, 부모님 직업이 뭐냐, 묻는데 나는 그럴때마다 작아지는 기분이었어. 이력서에 자격증 열 개 스무 개, 외국어점수 실컷 써놓으면 뭐해. 매학기 과탑하고 성적장학금 받으면 뭐해. 내 이력서는 그들에게 가난한 흙수저가 뭐라도 한줄 넣기 위해서 발악하며 살아온, 가난증명서일 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