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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만 내리는 비

by 해야리 Dec 0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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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보에도 없었는데 징글징글하게도 비가 많이 내렸다.


"서른이 넘어가지고 아직도 부모가 집에서 빨래하고 밥해주고... 한심하다. 느그 엄마가 내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밥을 차려놔도 니가 밥을 안먹는다느니 뭐라느니, 본인이랑 말을 안한다느니 하는데, 스트레스 받아 죽겠다."

"그만 좀 해요."

백미러 속의 엄마는 일그러진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너때문에 본인이 불행하다고 하고, 너때문에 이모들이랑 사이가 안좋아졌다고 하고, 너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도대체 무슨 말을 한거야."

"제발 그만 좀 해요."

엄마가 아빠 말을 자르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엄마 수술비도, 니가 뭔데 어른들 사이에 끼여서 천만원을 내고 생색을 내?"

"내가 무슨 생색을 내! 보험 가입해야되니까 말한거지. 돈을 내줘도 난리야?"


"이모한테는 왜그러는데?"

"이모가 나 출장중일때 전화를 몇번한 줄 알아? 죽을병 아닌데도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냐느니, 위험하다느니. 난 출장중이라 본가랑 3시간 거리에 있었는데, 이모는 본가에서 1시간도 안되는 거리에 살고 있으면서, 손녀딸 유치원 데려다줘야된다고 엄마 데리고 응급실 같이 못간다고 했었잖아. 내가 일 내팽개치고 어떻게 가! 팀에서 한달내내 준비한 행사인데... 서울에서 수술하고 난리통을 친 후에, 시골에서 안정 취하고 있는 환자한테 애기나 보게 하고. 내가 이모랑 말을 하고 싶겠어? 그리고 내가 이모에게 욕을 했어 뭘 했어? 대화를 피하는 것 뿐인데 이모랑 엄마랑 사이 안좋은게 도대체 왜 내탓이야? 말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나 말해. 그리고, 아빠는 왜 휴가를 못내? 왜 전부다 나한테만 의지하고 나한테만 짐을 지우냐고!"


매번 그랬듯이, 그동안 엄마가 아빠와 나 사이를 이간질 했나 보다. 피해망상과 과장된 말들, 이젠 놀랍지도 않다.

"다들 제발 그만하라고!"

엄마는 화가 나서 차에서 내려버렸다.

아빠는 1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차에서 온갖 막말을 퍼부었다.

생산적인 대화가 아닌 서로를 할퀴기만 하는 소모적인 대화였다.


***


반 년 간 몸이 정말 아팠다.

두통, 발열, 어지럼증, 기침, 구토, 불면증, 극심한 근육통 등등.

병원에선 감기도 아니고 알러지도 아니고 독감도 아니고 코로나도 아니라고 했다.

염증이 많이 보인다기에 항생제를 먹기 시작했다. 이젠 또 부작용과의 전쟁이었다.


항생제를 아무리 먹어도 상태가 좋아지지 않아

큰 병이라도 있는건가 싶어 대학병원에 갔다.

암도 아니고 결핵도 아니고 갑상선에도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염증은 있는데 우울증이 의심되니 신경정신의학과를 가보라고 했다.


"선생님, 전 마음엔 아무 이상이 없구요. 막 우울하고 그런 것도 없어요.

그냥 이 증상들이 너무 불편해서, 일하는 데 너무 방해가 되어서, 몸 고치러 온 거예요."

"환자분, 아침에 출근길이 고통스럽죠?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무것도 못하겠죠?"

"그건 아마 모든 직장인이 그럴 거예요."

"너무 걱정되어서 그래요. 제 말 믿고 신경정신의학과 한번만 가봐요."


신경정신의학과에 갔다.

눈빛이 맑고 따뜻한 의사분이 이것저것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다양한 검사지에 체크를 하고, 상담을 하고, 뇌파검사를 했다.

검사결과 불안장애와 강박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했다. 우울증 환자란다.


병원에 다녀온 약을 먹기 시작했다.

항우울제는 신비로운 약이었다. 매일 요동치던 나의 감정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밤마다 불을 끄고 자려고 누우면 이유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나에게만 몰리는 과도한 업무, 담당자의 힘듦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과도한 출장, 팀장의 막말과 가스라이팅, 내 노력을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들, 일하지 않고 나에게 일을 미루는 팀원들.

실장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실장과의 면담은 팀장의 보복으로 돌아왔고, 내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았다.

꾹꾹 누르고 외면하던 이 감정들은 결국 밖으로 터져나와 불안과 우울이 되었다.


다들 우울하지 않나? 나만 힘든게 아니라, 다들 저마다의 이유로 힘들지 않나?

죽고싶다는 생각보다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이 많은 업무 중 하나라도 놓치면 어떡하지? 라는 불안감인데

이것도 우울의 일종인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열심히 약을 먹었다.


***


한시간 동안 사라졌던 엄마는 두 눈이 잔뜩 부은 채로 차로 돌아왔다. 아빠는 짜증스런 말투로 말했다.

"오늘 다시 포항가는 배편 알아봐."

자리는 이미 모두 예약마감이라 돌아갈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우리는 냉랭한 분위기 속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서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밥을 먹었다.

여행을 준비할 땐 이 식당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밥먹는 장면을 상상했는데, 무거운 분위기에 체할 것 같았다.

엄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사장님이 우리 눈치를 보셨다.

"첫 손님인데 울면 예의가 아니잖아."

매번 감정컨트롤을 하지 못하고 주변 상황이나 분위기를 읽지 못하는 엄마가 짜증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정말 울어야 하는 건, 거짓말로 남편과 딸을 이간질한 본인이 아니라 나 아닌가?


돌아가는 배편이 다음날밖에 없다고 하니, 아빠는 그냥 울릉도나 한바퀴 돌자고 했다.

운전이고 뭐고 할 마음이 아니었지만,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내 평생 내 감정대로 뭘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기나 했던가. 생리통때문에 배가 너무 아팠지만 약기운을 참아가며 꾸역꾸역 운전을 했다.


관광지에 내릴 때마다 멎어든 비가 다시 세차게 내렸다.

마치 이 섬이 나를 반기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이 내가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듯이.

나는 중간중간 내려 바닷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마음을 식혔고, 아빠는 핸드폰으로 열심히 풍경사진을 찍었고, 엄마는 차에서 계속 울기만 했다. 정말 씹창난 분위기였다.


우린 3시에 숙소에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진통제를 먹고 긴긴 잠을 잤다. 그 둘은 내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버스를 타는 것도, 관광지를 검색하는 것도, 택시를 부르는 것도, 식당을 찾는 것도. 나를 가장 하찮게 생각하지만, 모든 것을 나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엄마가 큰 수술을 받아야 했을 때도 가족들은 모든 해답을 나에게 구했다. 구급차를 부르는 것도, 응급실에 데려가는 것도, 병원을 옮기는 것도, 수술날짜를 잡는 것도. 나 역시 모든게 처음이었지만 모든걸 해내야했다. 첫째라는 이유로. 힘들고 두렵고 무서웠지만 티를 낼 수도 없었다.


***

비는 도무지 그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세상의 모든 비가 나에게만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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