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저들은 왜 아이들을 낳았을까?
책임지지 않을 거면서, 잘 키우지 못할 거면서, 사랑해주지 않을 거면서,
아무 계획도 없이 멋대로 낳아서 아무렇게나 길렀다.
짐승들도 자기가 낳은 새끼는 사랑을 다해 키우는데
이 프로그램의 몇몇 부부는 짐승만도 못했다.
***
나는 모성애가 뭔지 잘 모른다. 엄마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줬고, 옷을 깨끗하게 빨아줬고, 비오는 날엔 우산을 들고 교문 앞으로 왔다. 그게 다였다. 사람들은 모두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것만 보고서는, 나에게 좋은 엄마를 가졌다고 했다. 하지만 내게 엄마는 그저 엄마라는 직업을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세상이 나를 버린 듯한 느낌이 들때, 극한의 상황에 도달할 때, 엄마는 내 곁에 없었다. 늘 짜증을 내기 일쑤였고,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이야기하면 "왜 그걸 나한테 이야기하는데?"라는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감정적인 교류가 전혀 없었다. 내 마음 속 엄마란, 남들이 나에게 돌을 던질때, 가장 앞에 서서 내 뺨을 때리고 침을 뱉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딸 여섯, 아들 하나인 집에 태어나 이모들의 지원으로 처음으로 대학교에 진학했다. 엄마는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는데, 미대생이라는 자부심이 엄청났다. 누가 직업을 물어보면 늘 "미대 출신이에요." 라고 말했다. 엄마 말로는, 미대 출신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우러러본다고 했다. 본인은 집안의 자랑이라고 했다. 어릴 적 나는 미대를 나오는 것이 엄청나게 대단한 건줄 알았다.
그런 엄마는 어른들의 소개로 장교였던 아빠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장교였던 아빠는 크게 교통사고가 난 후 군대에서 나와 막노동을 하며 살게 되었다. 엄마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교에서 공부도 제일 잘하고 그림도 잘그리고 집안의 자랑이었는데, 이렇게 살 순 없어. 욕심많고 승부욕 강했던 엄마는 동네에 작은 미술학원을 차렸다. 미술학원은 대박이 났다. 입구에 신발이 가득해 문을 열어두지 않고는 들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원생들이 많았다. 엄마는 새벽같이 나와 전단지를 돌리고 수업을 했다.
그때 겨우 다섯살이었던 나는, 세살짜리 동생의 손을 꼭 쥐고 오갈데 없이 떠돌아야 했다. 다른 아파트의 놀이터를 기웃거리고, 몰래 트램펄린을 타고, 잘 굴러가지도 않는 자전거를 타고 놀았다. 엄마는 우리 집에 있던 모든 장난감을 미술학원에 가져다놓고, 미술학원을 다니는 다른 아이들이 자유롭게 가지고 놀게 했다.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선물받은 구급상자 장난감도, 내 것이 아니라 모두의 것이었다. "이 장난감 내꺼야. 만지지 마!" 라고 떼를 쓰는 날에는, 아이들 앞에서 엄마에게 실컷 두들겨 맞았다.
집에가면 아빠는 늘 흰 나시 차림으로 소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오면 왜 늦게 들어오냐고 화를 내고, 조금이라도 일찍 들어오면 왜 일찍 왔냐고 화를 냈다. 어린 나는 그저 아빠의 감정기복과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야하는 샌드백이었다. 밖에서도, 학원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동생을 잘 지켜야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안전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나와 23개월 차이가 나는 동생은 너무나 작고 어리고 약해서 내가 보호해줘야 하는 존재였다.
아... 생각해보니 불안장애의 시작은 이때였던걸까?
아빠와 엄마는 밤새 싸웠다. 아빠는 군대를 그만두자마자 IMF를 직격탄으로 맞아 구직이 쉽지 않았다. 아빠는 자신이 백수라는 자격지심때문에 엄마보고 늘 '생색을 낸다'는 둥, '잘난척을 한다'는 둥 욕을 했다. 아빠와 엄마가 거실에서 큰소리를 내며 싸울 때, 나는 동생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으로 방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동생의 귀를 꼭 막고, 소리를 참으며 끄억끄억 울어댔다.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엄마가 다치지 않게 해주세요.
***
20년이 지난 후,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
"결혼하고 니가 생겼으니까 낳았지."
"내가 태어나면 어떻게 키우려고 했었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거기 나물 든 바구니 좀 줘봐."
그냥 임신을 했으니 낳은 거다. 어떤 부모가 되겠다, 어떤 자식으로 키우겠다, 어떻게 행복하게 키우겠다 라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무책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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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가 끝나고 아빠는 경비원이 되었다. 시간대별로 순찰하고 문단속을 잘 하면 되는 일이었다. 엄마는 전업주부가 되었고, 틈틈이 프리랜서 미술강사로 일했다. 동생과 나도 학교에 진학했다. 우리집은 표면적으로는 각자가 제 역할에 맞게 잘 살아가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속으로는 곪아터지고 있었다. 돈이 없었다. 엄마는 늘 나를 식탁 앞에 앉혀두고 집안의 경제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빠가 80만원을 벌어오면, 10만원은 공과금, 5만원은 관리비, 20만원은 식비... 턱없이 부족한 돈이야. 나는 결혼을 잘못했어. 그때 다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내 삶이 너무 불쌍해.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자격지심이 너무 강했다. 엄마는 소일거리로 조금씩 돈을 벌어 생활에 보탰는데, 인정욕구에 목말라하는 사람이라 도무지 생색을 내지 않고는 못버티는 정도였다. 그 둘의 성향은 매번 부딪혔다.
"당신이 말도 안되는 돈을 주면서 살림을 하라고 하니까 자꾸 일을 하려고 하지!"
"당신은 왜 매번 그렇게 생색을 내? 잘난척을 하지 않고서는 못배기지?"
"당신이 능력이 좋았으면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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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불안한 날들이 시작되었다.
부모라는 사람들은 자신도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살라느니 저렇게 살라느니 살아가는 방식을 강요했다. 1등을 하지 못하면 다 의미가 없어. 노력보다는 결과야. 넌 나중에 커서 법조인이나 선생님이 되어야 해. 아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나에게 투영시켰다.
나는 그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어른들은 항상 나보고 "애가 참 어른스럽다"고 말했다. 이모가 백화점에서 가방을 사주실 때도 미키마우스 가방이 갖고 싶었지만, 아무 무늬가 없이 그저 깔끔하기만 한 무지 가방을 골랐다. "어휴, 애가 어쩜 이렇게 보는 눈도 어른스러워."
나는 그때, '어른스럽다'는 말이 '사랑스럽다'는 말과 동일한 말인 줄 알았다.
시험을 못보거나, 수행평가를 망치거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스스로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스스로에게 욕을 했다. 너는 쓰레기야. 너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어. 너는 필요없는 인간이야. 부모가 나에게 했던 그대로, 내가 나에게 욕을 했다. 노력이나 과정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면서 느껴야 할 소소한 행복들, 예를 들어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거나, 노래방을 가거나, 체육시간에 공놀이를 하거나, 연예인 영상을 보거나 하는 일들이 나에게는 더이상 행복이 아니었다. 그저 일과의 한 부분이었을 뿐이었다.
나는 늘 공부를 잘했고, 반에서 1,2등을 했다. 운동도 잘했고, 미술도 잘했다. 잘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행복을 제치고 그만큼 나를 갈아넣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추억이 없다. 추억이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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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지독하고도 긴긴 사춘기가 찾아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