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저 사춘기였다고만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내 우울증은 고등학교 때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공부를 그럭저럭 괜찮게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가장 알아주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반에서 1~2등 하는 아이들만 모아놓으니 내신성적 받기는 하늘에 별 따기였다. 첫 중간고사가 끝나고 성적표를 받고 훌쩍이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를 포함해서.
사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던 나의 성적은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점점 떨어졌다. 틀린 문제가 있어도 학교 선생님께 물을 수가 없었다. '학원가서 물어봐라'가 그들의 답변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부도 못하면서 어디서 질문이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선생님도 있었다. 머리 나쁜 아이.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아빠는 말했다. 니 옆에 앉은 친구들 모두가 경쟁자라고. 아이들은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해 수업시간에 필기를 할 때도 손으로 가리고 했다. 서로 노트를 공유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웃고 떠들지만 모두가 낙오될 것을 두려워했다. 나 역시 그랬고, 그들을 멀리했다. 스스로 혼자를 택했다.
가끔 엄마에게 내가 겪고 있는 입시 경쟁 스트레스 같은 문제들을 상의했다. 엄마는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이렇게 기분이 우울한데." 가끔 엄마에게 내가 겪고있는 교우관계 문제들을 상의했다. 엄마는 말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내가 가르치는 애가 친구랑 싸움이 났대." 엄마는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겪는 문제보다도, 타인의 자식의 슬픔을 더욱 가슴아파하는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치가 떨렸다. 나는 배다른 자식이 아닐까 라는 고민을 아주 오랫동안 했다. 감정적, 정서적 학대라고 생각했다.
남들과 달리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을 여건이 안되니 대신 시간을 갈아넣자고 결심했다. 엉덩이 싸움. 나는 하루 왠종일 자리에 앉아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영어단어를 외우고, 점심시간에는 수학문제를 풀었다. 친구들과 노닥노닥 이야기하는 시간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뭐든 잘해내야 했다. 독해져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성적이 올라갔느냐? 아니다. 나는 공부 방향을 도무지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펜대를 붙잡고 있지만 머리가 멍했다. 같은 개념을 들어도 친구들은 잘 이해하는데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루는 너무 짧았고, 부족함을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잠을 줄여도 역부족이었다.
어느날 우리반에서 공부를 가장 잘 하는 애가 사물함 위에 걸터앉아 말했다.
"쟤는 쉬는시간마다 놀지도 않고 공부만 하는데, 왜 성적이 안오르는지 궁금해."
"머리가 별로 안좋겠지."
"쉿, 조용히 해. 들려."
정확히 들렸다. 그 애들의 말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여전히 상처다. 그 아이들은 잘 사는 집 아이들이었다. 부모가 변호사, 의사, 교수였다. 영어과외, 수학과외는 기본으로 했다. 학교 수업은 시간이 아깝다며 듣지 않았다. O가스터디같은 유명한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마라톤으로 치면 애초에 나와 출발선이 달랐고, 신고 있는 운동화도 달랐고, 타고난 체력도 달랐다.
스스로 자초한 외로움이었으면서도 친구가 많은 아이들이 부러웠다. 하하호호 웃고 떠드는, 10대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나는 나누지 못했다. 그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추억이야 좋은 대학교에 입학한 후에 쌓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땐 누구나 들으면 바로 아는 명문 대학교에서, 멋진 남자친구를 사귀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걸으며, 똑똑하고 예쁜 친구들을 사귀고, 여행도 많이 다녀야지. 지금 누리지 못하는 행복들을 그때 누리자고 스스로와 약속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오늘의 행복을 미루기 시작한 것이.
그렇다고 공부에만 올인할 수 있었느냐? 그렇지 못했다.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았고, 예민했고, 자존감이 낮았고, 감수성이 풍부했다. 생각은 늘 나를 집어삼켰다. 공부에 집중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아이들의 시선과 말투 하나하나가 가시가 되어 나에게 박혔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한 줄로 요약하면, 지독하게 외로웠고, 기댈 곳이 없었고,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었고, 비틀비틀 곧 쓰러질 것만 같았던 위태로운 시간들이었다. 유일하게 잘한다고 인정받는 것 하나가 있었다. 글을 쓰는 것. 문예부 선생님은 각종 백일장과 문예공모전에 나를 추천했다. 글을 쓰는게 유일한 도피처였다.
어느날 오랜만에 가족들끼리 외식을 하러 갔다. 불판에 고기를 올려놓은 후 아빠가 물었다. "넌 나중에 어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냐." 내가 말했다. "학교는 아직 모르겠고, PD나 방송작가가 되고 싶어요." 아빠는 갑자기 고기를 굽던 집게를 테이블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내가 겨우 너 PD, 작가 시키려고 이 고생을 하는 줄 알아? 그런 직업 해서 도대체 뭐 먹고 살래?"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놀라고 당황해서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아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엄마는 굽다만 고기들을 포장해달라고 했다. 수치심과 당황스러움, 소중했던 꿈이 발가벗겨져 능욕당한 느낌. 그 후로는 내 꿈을 더이상 입밖에 내지 않았다.
결국 좋은 대학을 못갔다. 나는 졸업식에 가지 않았다. 내 손에 쥐어진 건 고등학교 졸업장과 문예공로상 뿐이었다. 매일 오늘의 행복을 미루기만 했는데 결국은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가족들에게 세상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