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tart' 나의 20대 창업까지 이어져온 9년간 모든 기록들.
29살이 시작된 이 시점, 나의 20대를 짧게 기록해 보고 앞으로의 도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남긴 9년의 짧은 인생 기록. 주제를 무엇으로 정할까 생각하다가 처음 로고 외주단가 5만원에서 시작했던 내 모습과, 얼마 전 천만원이상은 거뜬히 거래대금을 끊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조금 자극적인 글의 제목을 선정해 보기로 하였고, 글에는 나의 20대를 짧게 기록하고자 했다.
그렇게 정해진 글의 제목.
22살, 처음 5만원을 재능판매로 벌었다.
22살 가을 만기전역을 앞둔 말년휴가 때 일할곳을 수소문했고, 집 앞 동네 슈퍼에서 경제활동의 첫 발걸음을 떼었다. 나지막한 가을바람에 안도의 휴식을 취하기엔 복학도, 취업도 너무 큰 산들이 눈앞에 있었고, 잠깐의 여유시간에는 어떤 분야든 도약하기 위한 일정한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7시에 기상하던 군대의 일상은 전역 후 자연스럽게 8시 아침 슈퍼 오픈을 위한 7시 기상으로 이어졌다.
군대에서 눈여겨보았던 포토샵공부를 손 놓지 않았었다. 다양한 지식을 습득하던 도중 당시 오투잼, 크몽같은 오픈마켓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의 재능을 그렇게 팔아보자 마음먹었다. 이 도전이 지금 나인웍스라는 회사를 만드는 데의 첫 발걸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첫 디자인 외주비용은 5만 원, 한 달에 30만 원도 안 되는 작은 돈이지만 슈퍼 월급과 함께하니 당시에는 꽤나 쏠쏠했었던 기억이 있다.
23살, 처음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
대학을 복학하고 유일한 취미였던 카메라로 조그맣게 모임을 만들었었다. '셔터스네이크'라는 이름의 조그만 모임으로 시작한 단체는 점차 커져 학교 동아리로 등록이 되었고, 운영을 하던 과정에 겪었던 많은 일들이 실로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 모른다. 카메라가 너무 좋아서 학교 앞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기도 했었고, 매일을 카메라에만 미쳐서 들여다보기도 했던 철없던 시절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나이가 들어보니 자유를 품고 무언가에 미칠 수 있던 나이에 적절하게 녹아들었던 내가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모른다.
23살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하던 내가 디자인전공에 확신을 갖고 전과를 하고, 방학에 장거리 학원도 다니는 등 회사로 연계될 수 있는 학업에 제대로 미쳐있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 밤새 공부하던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이들을 5년이 지나서야 이해하기 시작했고, 밤낮으로 디자인만 공부하고 디자인작업에만 몰두했던 날들로 가득 채워나갔다. 과정에 디자인 콘테스트 사이트인 '라우드소싱'을 알게 되어 대회참여에 몰두하였고, 수중에 100만 원이 넘는 금액을 디자인상금으로 얻기도 하면서 다양한 스펙향상 활동들을 이어갔다. 틈틈이 사고 싶은 것은 많아서 매일같이 야간 편의점 알바를 했던 기억도 있다.
23살은 전혀 아깝지 않았던 소중한 시간들로 가득했다.
24살, 첫 직장에서 처음 일과 인생이라는 것을 배웠다.
23살 처음 꿈과 목표가 생겼고 남들보다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했기에 조급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분명 노력하면 잘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영상디자인분야, 인터페이스디자인분야등이 새로이 강세를 보이면서 디자인학부생으로썬 여러 갈래로 잔가지 치며 시간소비의 늪에 빠지기 좋은 시기, 나도 물론 제품디자인이라는 잔가지를 잠깐 쳤던 적이 있지만 시각디자인분야 하나만 감당하기에도 해야 할 게 너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빠르게 정리하고 집중하였다.
학업과정에 일전에 알게 된 라우드소싱 콘테스트를 통해 몇 차례 의미 있는 경제활동을 하였고, 과정에 수상을 하며 알게 된 회사와 연결이 되어 여름방학에 인턴을 나가게 되었었다. 대학교수가 운영하던 수원의 조그마한 수원의 스타트업이었다. 옆 회사 대표님이 연세가 꽤 있으시고 조직문화가 아직 묻어있는 편이었던지라, 화장실청소며 아침에 커피 타다 주는 등 온갖 잡일도 많았고, 디자인업무를 배제하고도 마케팅, 업체 감리, 일이 없을 때면 백화점 팝업스토어도 나가는 등 바쁘게 회사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통장에 들어오던 월급은 세금 떼고 184만 원. 당시 교제 중이던 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월세도 감당하며 먹고살기엔 턱없이 부족했기에 퇴근하고 자연스럽게 디자인 부업을 했었다. 9시부터 1시까지 꾸준히 이어져오던 부업활동은 월에 100만 원씩은 꼬박꼬박 수입을 가져다주었었다. 그렇게 바쁘지만 참 애틋했던 24살, 그땐 경기도생활을 오래 해나갈 줄만 알았었다.
25살, 모든 걸 잃고 바닥에서 무모한 도전, 창업에 도전했다.
퇴사를 했다. 자진해서 그만두겠다고 하였고, 후회는 없었다. 자신감이 항상 넘치던 나였는데 그때는 마주하던 모든 것들이 나를 너무 초라하게 만들었었다. 출근날 아침, 이중주차로 회사출근에 늦어 급히 택시를 타고 가던 길, 9시가 훨씬 넘은 시간 연락한 통 없던 핸드폰을 보며 회사에서의 내 존재에 대해 의문이 점차 실망으로 바뀌었었고, 잦게 비교되던 당시 만나던 이성친구의 능력과 주변 유능한 지인들의 대기업 취업소식은 한없이 나라는 존재를 바닥으로 끌고 내려왔다.
사실 당시 나에게 물러설 곳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직서를 내고 돌아온 병점역 오피스텔, 아직 4개월 넘게 남은 월세를 미리 집주인에게 다 낸 후 고향인 세종으로 발을 돌렸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려 마음을 잡았는데 심란하기만 할 뿐 눈앞에 방황하는 내 모습만 사물에 비추어졌었다. 토익을 해보려고 연필을 손에 쥐어봐도 생전 공부도 제대로 안 했던 놈이어서 그럴까 늘 그랬듯이 도돌임표였고, 디자인작업에도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가을바람에 무수히 생각에 많이 잠기던 때, 잡념을 떨쳐내야 할 일이 많았고 눈 씻고 찾아봐도 이 모든 상황의 유일한 해결수단은 디자인 작업밖에 없었다. 무심코 회사 다니면서 뽑아둔 새 차 유지하려면 한 달 벌이가 없으면 안되었었기에, 그렇게 일상적인 이유로 다시 콘테스트와 외주를 시작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정말 물러설 곳이 없어서 이전보다 더 독하게 작업을 했던 기억이 있다. 30번 대회에 참여하면 25번은 탈락했기에 탈락할 때마다 이유를 자주 곱씹어보기도 하고 부족한 점을 어떻게든 매워보려 애썼다.
운이 좋아서였을까 노력하던 하루하루에 점차 클라이언트가 생겼고 거래를 트기 위해 자연스럽게 나는 사업자등록을 했다. 이전에 이미 간이사업자 등록이 되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사업자 전환을 했고 그렇게 26살 겨울까지 달려서 만들어낸 내 첫 사업자 매출은 '2800만원'. 마지막 두 클라이언트 업체가 합해 천만 원 가까이 결제를 해주면서 만들어진 비균형적인 매출이었지만 부끄럽게도 내 첫 직장 세후월급을 합친 연봉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26살, 대형 클라이언트와의 첫 거래.
학교로 복학했다. 코로나시기였기에 학교는 대부분 비대면수업을 했고, 혹시 모를 대면 수업에 대비해 학교 근처 직장인들 모여사는 신도시에 원룸을 잡아하던 사업을 이어나갔다. 개강한 후에는 평일에 자주 미팅이 있던 경우가 많았기에 적절히 수업시간과 조율해 가면서 바쁘게 살았다. 그렇게 달려가던 중 우연이었을까, 오랜 외국인 친구를 만나러 명동에 놀러 왔던 날, 주머니 속 핸드폰에 울린 협업제의 메일 한통.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의 디자인 작업 제안의 건이 담긴 메일이었다. 한 주간 담당자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을지로 본사에서 10시 미팅이 있던 전날, 미리 서울로 올라가 미팅준비를 하던 그날 밤의 야경은 평생 기억에 남는다. 대형 프로젝트를 계기로 점차 회사 규모를 키워갈 수 있었고 자연스레 필요로 하는 능력이 많이 요구되었길래 공부와 다양한 연구는 일상이 되어갔던 26살이었다.
27살, 나의 애증의 첫 사무실.
26살이 끝나던 겨울 아직 대학교 마지막 학년 과정이 남아있음에도 일을 조금 키워보고 싶다는 마음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하나로 서울근교로 사무실을 옮기는 결정을 내렸다. 모아둔 돈 2천만원남짓 보태어 사무실을 구하려고 지도를 켰고, 주 거래처들이 분포되어 있는 지점의 중간점을 찍어보니 고양시 삼송동이 나와서 그렇게 단 한 번의 선택으로 고양시 삼송동의 여느 사무실로 추운 겨울날 트럭한대에 짐을 싸 이사를 했다.
스타필드와 이케아가 근처에 있던 조용한 삼송역, 거래처 오다니기도 편한 장점은 있었지만 단점이 더욱 많았다. 학교 수업이 있던 날은 200km 장거리를 내려가 수업을 들어야 했기에 한 달에 50만 원 가까이 기름값이 나오기도 했지만 선택의 대가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진짜 단점은 이쁜 것만 보고 통창의 사무실을 구했다가 무더운 여름에 참 많이 고생을 했다는 점이다. 시행착오가 정말 많았던 일 년이었지만, 서울 근처로 간 덕분에 클라이언트가 많아져 매출은 작년보다 두 배이상 올릴 수 있었고, 많은 거래처대표님들을 알게 되었다.
건에 2천만원이 넘는 대형 프로젝트도 이즈음 처음 들어왔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미흡한 모습이 가득했지만, 그러한 어린 모습으로 마주하며 배웠던 현실이 보다 체계적으로 일을 이끌어나갈 수 있도록 발전시켜주었던것 같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할 줄 알았던 27살의 상승곡선은 사랑하던 반려묘 둔둔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바닥은 물론 일상의 많은 것들이 망가지는 겨울을 마주했다. 사람과의 이별은 못다 한 이야기라도 할 수 있지만 아이와의 사별은 어떠한 소통도 없이 떠나보내야 했기에 더욱이 아팠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가슴 한편에 안고 해결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사람은 어떠한 경험의 기억이든 마지막 부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나의 고양시 첫 사무실의 기억은 그렇게 평생 묻어두고 싶은 한 편의 과거로 자리 잡힌 것 같다.
28살, 챙겨야 할 가족이 생기고, 뛰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28살 시작은 너무나 처량했다. 반려묘와 사별의 감정과 더불어, 이전 갈등이 있었던 업체가 보내온 내용증명에 힘들었던 기억, 돈 불려보겠다고 넣은 주식의 많은 돈이 몇 주 만에 휴지조각이 되기도, 온갖 악재로 시작한 내 28살은 25살 사직서를 냈을 때보다 이력만 가득 차있을 뿐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필요했던 것은 약간의 성장이 아닌 모든 상황을 뒤집기 위한 반등이 필요로 했었다. 일은 꾸준히 있었고, 몸집 키우기가 필요했으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시간을 전부 일로 태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루에 4-5시간만 자며 일했고, 어느 순간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자연스레 일상으로 녹아들었다. 안 좋은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더 많이 무리했었다. 그 과정에 대학원 진학도 선택하여 바쁜 일상을 두배로 바쁘게 만들었고, 온갖 사업에 참여하여 주에 1번 쉴까 말까 한 수준이었으니. 이는 참고로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닌 것이, 나보다 더 유능하고 잘 나가시는 대표님들의 하루는 내일상보다 더욱 고되고 정신없으며 바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2월부터 12월까지 10개월 일만 하고 살았다. 사별의 감정은 가슴 한편에 묻어두고 하나하나 회복해 나갔으며 과정에 법인사업자설립 진행도 틈틈이, 직원 채용 및 관리등 하나하나 개선해 나갔다. 12월에 모든 일들이 마무리되고 갖추고 싶은 내 모습 하나만 보고 달려왔고, 그 결과 내가 바라던 회복된 모습의 28살 겨울을 맞이하였다.
24살 학생으로 참여했던 콘테스트 주관사와는 기업대 기업으로의 협업관계가 되었고, 다양한 디자인 심사직으로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운이 좋게 대학교 출강도 하기도, 다양한 컨퍼런스에서 경험을 쌓기도하며, 매일같이 많은 클라이언트들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수히 많은 동기부여들이 품겨있는 일상은 나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겨져 있는 현실이고, 노력에 의한 성장은 내가 앞서가는 만큼 남들은 두세 배 더 높게 도약하고 있음을 겨울의 소식들로 전해져 듣게 된다. 다재다능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현실은 한 가지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지 못하면 다재다능한 능력은 온전히 잡다한 기술정도로만 취급을 받기에 역량강화에 초점이 어디로 맞추어져야 할지, 시간 배분을 어떻게 할지는 몇날며칠 깊게 고민해며 해결해나가야 할 숙제들이다.
무엇보다 지금은 하고 싶은 일 보다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곁에 생겨 원동력이 되고 있고, 많은 결정과 도전에 책임이 따르는 것은 물론 멀리 보는 지혜도 많이 필요로 한 시기이다. 96년생 쥐띠는 2024년이 마지막 삼재라 하였던가, 길면 길었고 짧았다면 짧았을 2023년 고된 시간을 참 잘 버텨왔다.
29살, 나의 마지막 20대, 그리고 새로워질 미래를 위한 'restart'
어디까지 왔을까. 정신없게 달린 기억뿐인 현실, 살아가다 보니 벌써 맞이하게 된 나의 마지막 20대에 지금 나는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29살은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시기이고 이전의 노력은 물론 더욱 칼을 갈아야 빛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한번 고독의 배경을 뒤로 두고 조용하고 꾸준한 성장을 준비하려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습관과 방식은 효율적으로 바꾸고, 보이고 있는 모든 지표면에 대해서도 재해석을 진행하고자 한다.
3년을 무지성으로 이력만 쌓아왔다면 지금은 비추어지는 곳에 알맞게 정리된 만인의 이력서가 필요한 시기이다. 이전보다 겸손하게, 더 독하게 나만의 성장을 준비하고, 해왔던 모든 일들은 효율적으로 정리하며 담아내는 'restart'를 준비하려 한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몇 년간 찍히던 나의 '산만하고 집중력부족'이라는 수식어구를 올해 도약으로써 완전히 벗어내어 다르게 성장했다는 증표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