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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영작가 Jan 09. 2024

잎을 기다리며 본질의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일

자라나는 무수한 새 생명들에게 올바른 물을 주는 일들.


 잎을 기다리며 본질의 씨앗을 심고 기다리는 일
 

밭에 씨앗을 뿌리고 원하는 열매까지 기다리는 일은 결코 며칠 만의 기다림으로 이루어지는 성과가 아니다. 더하여 씨앗 하나에 담아내는 정성의 가치에 피어날 생성물이 기대 이상일지 또는 이하일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의 일상과 같다.

지금의 일상에 담아내고 목표로 하고 있는 일들은 내가 바라보는 목표의 근사치에 머무를 수는 있을지 명확한 확신이 없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는 지속적으로 키워나가는 태도와 마주하게 될 결과물을 미리 과하거나 적게 예상하여 변수를 두는 태도를 줄여나가는 일이다. 
 
누구나 같은 토양에 자신만의 씨앗을 심고 싹이 트길 기다린다. 어떤 이는 조금 더 기름진 토양이 배경일수도, 어떤 이는 싹이 피어나기 힘든 토양이 배경이 될 수 또 있다. 공평하지 않은 배경조건에 대한 이야기를 역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이는 기름진 토양에서 잡초를 틔울 수 도있고, 또 어떤 이는 반대로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조그만 땅에서 큰 나무를 자라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목표물에 대한 이야기와 별개로 과정에 대한 차이점으로는 초반에 싹이 자라나지 않은 것 같다고 스스로판단하여 자주 씨앗을 심었다 파내었다를 반복할 수도 있고, 성장이 어려운 씨앗을 심고 오랜 기간을 기다릴 수도 있다. 이 모든 판단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으로 ‘책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책임을 앞다투어 이야기하기 전에 본질에 대한 핵심으로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신감에 대하여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감은 본래 무언가에 대하여 확신이 설경우 생겨나는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기에, 타인에 의한 시도 또는 배경에 쫓겨 흘러가는 대로 판단의 근거를 내세우는 상황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근거의 배경이 내가 설정한 목푯값에 가능성이 충분하다 판단되어 행하는 사항이기에 어느 정도의 확신이 배경에 있는 편일 것이다. 본인의 상황이 전자인지 후자인지 판단해 보고 이야기에서 핵심을 잡아내어보자.


씨앗에 담아내는 본질에 대해 확신이 있다면 조급함에 흔들리지 않고 인내를 안고 기다려보자. 어떠한 식물이라도 꽃이나 열매를 틔우려면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하기에 말이다.
 
또한 혹시 내가 씨앗을 키우는 방식이 너무 타인이 행해왔던, 누구나 알법한 방법이 아닌가에 대해서도 고뇌해 볼 필요가 있다. 당연 타인의 가이드가 존재하는 재배방식은 보다 안전할 수 있지만, 생성된 결과물에 대한 척도가 어느 정도 가늠이 되고 이는 본인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결과치이기에 변별력이 없고 다른 특출 난 경쟁모델의 범주가 생겨날 경우 빠르게 후퇴될 수 있다. 그렇기에 타인의 이끌림에 몸을 담고 그대로 행하는 것도 절대 좋은 방법은 아니다. 
 
걸어가고 있는 일상에 대한 정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과정에서 본인만의 형용사를 도출해야 한다. 
 
 
 


말 한마디 못하는 금붕어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누구나 약점은 존재한다. 정신없는 하루를 맞이할수록 개인에 대한 정비에 할당되는 시간이 부족하기에 기존보다 더욱이 타인에게 약점이 많이 노출될 수 있다. 지향하고 있는 목표점에 대한 도약의 높이가 높아짐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단점이라면 이를 굳이 외면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목표를 안고 있거나 행하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이에게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며, 틈틈이 보완점에 대한 메꿈을 시도를 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된다. 본인의 약점을 눈감는 행위보다 더욱 무서운 점은 이를 알면서도 이를 본인을 칭하는 하나의 형용사로 여기고 곁에 두는 행위이다. 어떠한 보완점도 두지 않고 ‘나는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정의 내리는 태도는 인생에 하나의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로 개선의 가능성을 0에 두는 것으로, 이를 절대 본인 스스로를 잘 인지하고 있는 태도라 착각하면 안 된다. 
 
학업에 대한 특출 난 가능성이 없음을 학생 때 많이 느꼈었던 필자는, 타인 앞에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 또한 많이 부족하여 20대 초반에는 남들 앞에 나서거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두면 안 될 것이라 생각을 자주 하였었다. 또한 개인의 생각을 글로 담아내는 일도 언어력이 부족하여 본인에게는 5줄 이상 글쓰기가 힘들었었기에 라이팅 스킬은 불가능한 영역이라 판단하였고, 개선의 여지는 커녕 무한의 반복적인 삶의 테이프에 감겨지기만 하였다. 하지만 현실 앞에 확신을 갖게 된 직업이 앞서 이야기한 나의 모든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야 하는 특성을 갖고 있었고, 기본적인 특성을 강점으로 두는 것을 목표로 했기에 넉넉한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프레임을 벗어나려고 생각을 뜯어고치기 시작하였다.


상상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직업이 바로 필자의 직업인 디자이너이다. 인류는 발전의 과정에서 먼저 소통 기본으로 두고 표현을 위해 그림, 상형문자를 다루었고, 나아가 언어를 표현하는 글을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이 되는 언어와 글이 기본이 되어야 이를 기반으로 생성물에 대한 형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매번 느꼈었다. 그 동기부여 앞에 갖고 싶은 공기방울을 보면서 말 한마디 못하고 뻐끔거리는 금붕어는 내면에 모두 죽이기로 하였다.


언어력이 부족한 디자이너는 시각표현의 기초조차 되어있지 않은 전문가일 뿐이다. 본인이 이끌어낼 프로젝트의 도입부와 엔딩을 잇지 못한다면 이것이 무슨 쓸모에 있으랴. 필자의 전공분야는 그랬었다. 모든 사람들에겐 각자의 전문분야가 존재하고, 각 분야에서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이를 위해 필요로 한것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그리고 과정에 아무 쓸모없는 내 모습은 무참히 짓밟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새로이 바뀌어갈 나를 위한 축복의 박수로 감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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