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빛,고을

by 혜윰

광주에서 나고 자랐다. 5.18이 있던 1980년에는 내 나이 7살,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였다. 철부지였던 나와 내 친구들은 세상 돌아가는 걸 몰랐다. 그냥 집 밖에 나가면 위험하다는 부모님 말씀에 짜증이 났고, 옆 동네 아무개가 탄피를 세 개나 주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부러워 했다.


엄마는 나주에 계시는 이모님 댁에 다녀오는 길에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허겁지겁 뛰어오던 어느 청년을 보았다고 했다. 잔뜩 겁에 질려 뛰어 오더니 저 좀 숨겨 주세요. 하더란다. 영문을 몰랐던 엄마가 어리둥절 하는 사이 군인들이 쫓아와 청년을 끌고 가더란다. 엄마는 그 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청년을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괴로워 하셨다.


세월이 흘렀다. 5월의 어느날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친구를 따라 금남로에 갔다. 도로 위에는 차가 한 대도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로 한 가운데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았다. 도로 양 옆으로는 전시회를 연상케 하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진열 돼 있었다.


가슴이 두부처럼 잘려 있던 여성. 얼굴이 반쯤 짓이겨져 있던 청년. 트럭 가득 실려 있던 시체 한더미. 학생들이 민주주의 깃발을 들고 우르르 달려오고, 그 앞에서 총을 겨누고 있던 계엄군들. 시민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시위대에게 나눠주고, 농부들이 호미와 삽을 들고 달려와 누가 우리 애들 잡아가냐고 호통치던 사진들.


모자이크 없이 사실그대로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들은 다소 충격적이었지만, 묘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진을 보는 내 마음에 슬픔이나 공포보다 앞 선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무어라 표현할 수 없던 숭고함이었다. 분명 뼈 아픈 시대의 아픔이고 불운의 역사 었지만, 민주주의를 향한 그들의 신념, 희생은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했다.


다음 해, 1981년에는 막내 작은 아버지가 대학가요제에서 '바윗돌' 이란 노래로 대상을 받았다. 작사, 작곡, 직접 기타를 치며 목 놓아 부르던 노래. 천재가수라는 극찬을 받으며 대상을 수상 했다. 하지만 그 노래를 만들게 된 배경이 5.18로 목숨을 잃은 친구를 기리기 위함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삼촌은, 그리고 삼촌의 음악은 철저히 매장되고 말았다.


그래선지 나에게 5.18은 조금 더 특별한 의미다. 내가 철없이 탄피를 주어 모으던 고향. 슬픔보다 숭고함으로 다가왔던 금남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마치 한 가족처럼 함께 싸우던 사람들. 비운의 천재가수 작은아버지 정오차. 잊지 못할 그 노래 '바윗돌'


혹자는 전라도 깽깽이, 좌북 빨갱이, 홍어 어쩌고저쩌고 하며 비하하지만. 광주가 고향인 우리들은 그깐 저급한 조롱거리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고향이 광주라서 얼마나 자랑스럽고 뿌듯한지 그들은 이해 못할 것이다. 광주는 빛의 고장이다. 광주는 민주주의의 성역이다. 5.18은 우연히 탄생한 게 아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그들의 희생에 누가 되지 않을 바른 삶을 살리라 다시 한번 다짐해본다.



by 혜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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