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한 장의 설움
어릴 적 우리 집은 가난했다.
밥상 위에 김 한 장이 올라오면, 엄마는 그것을 삼 형제에게 나누어 주셨다.
가위로 정확히 세 등분을 해야 공평했겠지만, 엄마는 늘 손으로 대충 찢어 나누셨다.
그리고 언제나 내 몫이 가장 작았다.
오빠는 맏이라고 조금 더 받았고,
남동생은 막내라서 늘 각별했다.
나는 그 중간에서 엄마의 설득을 들어야 했다.
“네가 양보해라.”
그 부당함에 나는 적잖이 엄마를
원망하며 자랐다.
세월이 흘러 내가 엄마가 되어 보아도,
그때의 기억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공평하려 애썼다.
혹시라도 나처럼 오래 남는 상처가 생길까 봐,
나는 늘 한 번 더 마음을 살폈다.
구순이 다 되어가는 엄마는 병든 몸으로 내 집에 오셨다.
그제야 엄마는 내게 여러 번 사과하셨다.
“그땐 형편이 없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미안하다.”
내 딸에게 내가 하는 일상을 보며,
엄마는 오래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 듯했다.
역할은 그렇게 바뀌었다.
엄마는 내 돌봄 속에 계셨고,
나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와도 나누지 않는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의 몸은 쇠약해졌고
마음마저 쉽게 무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어린 시절 억울했던 감정은 사라지고
대신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세상에서 가장 부당한 현실이 있다면
아마 이런 것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불공평한 사랑 앞에서 울었고,
이제는 무너져 가는 엄마를 보며
다시 울어야 한다는 것.
고관절 탈골 증세는 더 심해졌다.
버티다 못한 엄마는
스스로 요양병원을 택하셨다.
사위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더 이상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도 삼십 분 면회 시간 동안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눈물을 닦았다.
엄마를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울음을 삼키지 못한다.
뒤늦게 찾아온 이 연민을
나는 아직도 정확한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엄마와 함께 보낸 이 삼 년이
내 인생에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평생
엄마의 사랑이 어긋났다고만 생각하는
철없는 딸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아직 살아서
엄마를 볼 수 있음에
나는 오늘도 조용히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