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콘돔을 모은다. 새 콘돔이 아니라 쓴 콘돔을 모은다. 진실게임 때 ‘나는 집착하는 물건이 있다.’에 걸려서 솔직하게 말했는데 다들 눈이 동그래지면서 그걸 왜 모으냐고 다들 손사래 쳤다. 겉으로 질색하던 사람들은 우리의 모임이 끝나고서 내게 따로 연락해 자긴 이런 걸 모은다며 따로 연락했다. 어떤 사람은 브래지어 와이어, 어떤 사람은 못 입게 된 팬티, 어떤 사람은 똥 닦은 휴지. 각자 이유는 달랐으나 나는 금방 그들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낸다.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거. 영순이 문자를 보냈다.
-나는 브래지어 와이어를 모아. 다들 브라렛으로 갈아타거나 가끔 안 입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데 불편해도 가슴을 지탱해 주는 게 좋아서 바꾸질 못 하겠어. 바꾸면 편하다는데 너무 오랫동안 와이어 있는 브래지어를 입어서 그런가? 어떨 땐 그냥 내 피부같이 느껴지기도 해. 아 맞아, 이걸 왜 모으냐면 내가 성장한 걸 느낄 수 있어서 모았어. 남들은 일기를 쓰거나 하다못해 사진을 찍는데 그런 건 뭔가 사치스럽게 느껴졌어. 난 글 쓰는 것도 안 좋아하고 내가 사진에 나오는 건 더더욱이 못 참겠거든. 너무 간지럽잖아. 난 그냥 내 흔적 없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나만 아는 흔적’만이 나를 증명해 줬으면 좋겠어. 남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어. 그냥 내가 죽기 직전까지 나를 기억해 줄 수만 있다면 될 것 같아. 특이하니까 바로 기억나지 않을까? 우리 엄마는 치매에 걸렸는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를 때가 많아. 그런 모습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 나도 그렇게 될까 봐 굉장히 두려워. 내가 30살 되던 때, 그러니까 엄마는 60살이었지. 그때 엄마가 냉장고에 리모컨을 넣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외출한 엄마를 파출소에서 만나서 모셔왔었어. 벌써 15년 지났네. 그리고 모아놓고 보면 그런 생각도 들어. 내 뼈대 같다는? 정말 그래. 내 시체를 미리 수습하는 기분도 들어. 이것마저 안 하면 나는 나한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다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아. 뭐, 그런 이유로 그런 거였어. 너의 이야기도 비밀로 해줄게. 내 이야기도 비밀로 해줘.
5년 전의 나라면 무슨 와이어가 뼈대냐며 코웃음 쳤겠지만 지금의 나는 읽으면서 눈물이 흘렀다. 그가 안쓰러워 보였고 동시에 어떤 생명감을 느꼈다.
"어렸을 때는 머리뼈, 커서는 다리뼈, 갈비뼈이려나? 무슨 뼈인지도 이름 붙여주면 재밌겠다. 응원할게."
답장을 보내자마자 전화가 왔다.
“그때 네가 취해서 못 물어봤어. 너는 왜 쓴 콘돔을 모으는 거야?”
“그걸 알려면 내가 소주 8잔에 알딸딸해졌을 때 대답할 수 있어. 저번 모임 때는 소주 10잔을 마셔서 대답할 수 없었어. 나의 말은 화초와도 같아. 적당한 온도, 습도, 바람이 있어야 잘 자랄 수 있지.”
“술 마시자는 거네? 알았어, 저번에 모였던 거기서 만나.”
“그래.”
거울에 비친 나의 파란색 눈동자가 어쩐지 오늘따라 더 우울해 보였다. “자기, 뿌염해야겠는데?” 뿌리 쪽에 노란색 머리가 자라나 있었다. 한국에 왔던 겨울날, 여자친구가 이끄는 대로 미용실에 들어가 까만색으로 염색을 했었다. 벌써 5년이나 흘렀다니, 시간 참 빠르다. 나는 약속이 있다며 여자친구를 집에 둔 채로 혼자 밖에 나왔다.
“여기야, 존.”
“존 말고 준석이라고 불러줘.”
“알았어, 존. 아니 준석. 나 같으면 고향에서 편히 살 텐데 왜 굳이 한국에 와서 한국인처럼 꾸미려고 하는 거야?”
“영순, 나는 있지. 주변에서 우리나라에 좌지우지되는 걸 보면서 진절머리가 나더라. 가진 것도 쥐뿔 없는 게 뭘 그렇게 힘이 있다는 듯이 구는지 그 가식에 너무 토가 나왔어.”
“미국을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근데 너 몇 년 사이에 한국어가 많이 늘었다? 우리나라라니, 한국도 우리나라라고 하더니?”
“주변에서 하는 소리 주워다가 쓰는 거야. 별거 없어. 그나저나 내 얘기가 궁금하댔지? 술은 네가 사는 거야, 영순.”
이번 만남은 기존 멤버 중 영순만 나와서 얘길 나눴다.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여자친구의 소개로 한 사람을 만나 영어 과외를 해줬다. 꽤 돈벌이가 되었고 나중엔 유튜브와 접목하여 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적당한 수입을 꾸준히 벌고 있었다. 나이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는데 그중 23살이었던 한 아이가 나를 짝사랑하는 바람에 나의 코리안드림이 무너져 내렸다. 내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어장남이라고 소문냈고 별별 이상한 말을 덧붙여 나를 깎아내렸다. 나는 모든 사건이 벼랑 끝에 몰리고 나서야 알았다. 갑자기 수강생들이 수강 취소 문의를 엄청나게 해댔고 댓글에도 꼴도 보기 싫다는 격한 표현이 달려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는 것이 두려워 댓글은 보지 않았는데 여자친구가 이번에는 꼭 봐야 한다는 말에 보고 말았는데 나는 한국 사람이 이렇게 무섭구나 하고 느꼈다. 여차저차 그 아이를 만나 얘기를 나누고 헛소문을 수습하긴 했지만 떠나간 수강생은 돌아오지 않았고 한번 박힌 내 이미지는 바꿀 수 없었다. 유튜브 계정을 삭제하고 존에서 준석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영어 과외 수강생을 다시 모집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몇 달간 여자친구의 자취방에서 폐인처럼 지내다가 여자친구가 밤늦게 퇴근해 밥까지 차려주는 모습을 보고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공사판에 뛰어들었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들이 모여 나누는 얘기는 어딜 가서도 듣고 볼 수 없는 영화의 세계였다. 여자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그걸 유튜브에 올리자고 나를 설득했고 나는 그들을 인터뷰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다. 수강 취소를 했던 사람들은 내가 인스타그램에 유튜브 홍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나는 그들과 연락하게 되었고 10대 혜연, 20대 수지, 30대 영희, 40대 영순, 그리고 30살인 준석. 바로 나. 우리 모임의 이름은 ‘털린 사람들’ 각자 구구절절한 사연이 녹아 있다. 여자친구도 가끔 참여를 하는데 너무 재밌다며 유튜브에 올리자고 나를 지지고 볶는다. 이 모임의 얘기는 절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다. 나만 알고 싶다. 나만 알고 싶은 가수, 뭐 그런 느낌이려나.
“나는 여자친구와 섹스를 할 때만큼 열정적일 때가 없어. 주말에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는 건 내 삶의 원동력과도 같아. 섹스에 미친 사람처럼 들리겠지만 그것보단 나의 열정에 관해 얘기하고 싶어. 여자친구는 콘돔을 원하고 물론, 나도 지금은 아이를 책임질 여건이 안 되니 피임을 해야 하는 것에 동의해. 콘돔에는 내 정액이 모이지. 그때 나는? 엄청 땀을 흘리고 있어. 누구보다 세상 열심히라고. 그런 흔적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 그전까진 당연히 버리는 거라고 쓰레기라고 생각해서 버렸는데 그 사건, 알지 영순? 그 이후로 마음을 다잡고 공사판에 뛰어들었을 때 여자친구가 단아한 옷을 입고 있는데 그렇게 몸이 달아오를 수가 없었어. 너무 고마워서 내 성기가 서버린 거야. 그다음은 너도 나이가 있으니 알겠지. 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