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번을 반복한 결과, 안영희는 알았다. 비밀은 무서운 것이었다. 자꾸만, '그러니까 내 인생은 라이프 오브 파이라고요.'를 외치게 하는, 도돌이표였다. 안영희는 차를 따르는 누군가를 생각했다. 주전자 뚜껑이 열렸든, 일부러 엎었든 간에 나무 탁자에 차를 쏟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 그 누군가는, 얼굴을 비볐을 거라고. 향이 잔뜩 베어 들어 기분이 좋아졌을 거라고. "그런데 있지, 얼굴에 피가 났을 것 같아." 안영희는 노희영에게 말했다. 노희영은 안영희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대답했다. "왜?" "말만 하지 말고, 너도 생각이란 걸 좀 해봐. 우리 같이 쓰는 이야기잖아." 노희영은 안영희의 말에 살짝 짜증이 났으나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피가 난 이유는, 네가 이미 정답을 만들어놓고 나한테 문제를 낸 거잖아. 그러면 너무 이기적인 물음 아니야?" 안영희는 자신의 얘기를 대충 듣는다고 생각했던 노희영에게 정곡이 찔린 기분이었다. "그건 그런데." "그리고, 애초에 네가 얘기하는 건 이미 다 너의 머리에만 있는 것인데 그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계속 그렇게 다그치려고 참은 거야? 답답해. 너랑 얘기하면 답답해." 노희영은 답답하다는 말을 계속 내뱉으며 자리를 떠났다. 얼음 하나 들어간 커피 믹스 한 잔이 노희영의 잔향을 담당했다. 안영희는 혼자 말을 이어갔다. 창밖의 노희영을 바라봤다. 노희영은 갈지 말지 고민하는 듯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남편이 만든 나무 탁자에 얼굴을 비볐거든. 나무 탁자의 거친 부분에 긁혀 얼굴에 피가 난 거야. 난 네가 다시 들어올 걸 알아." 노희영은 화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이내 숨을 들이마시고 깊게 내쉬었다. "그래, 나 귀 좋은 거 알지? 다음 얘기가 궁금해서 들어왔다곤 자존심 상해서 말 못 해." 안영희와 노희영은 화해를 했다. 안영희가 먼저 얘기했다. "미안해, 이기적이었어." 노영희도 안영희처럼 사과했다. "나도 미안해, 같이 소설 쓰기로 했는데 피해서. 사실 네가 질투 났었어. 넌 이야기를 곧잘 만들잖아." 안영희는 뜻밖의 노영희의 속마음을 들었다. 안영희는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냐, 너도 잘해. 뭐든 잘해. 그냥 그거 하나만 못 하는 것뿐이야." 안영희는 국어국문학과, 노영희는 문예창작과를 나왔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둘 다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상내역과 경력이 대신 증명하느냐고 입을 열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 둘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안영희는 자신을 인정했고 노영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안영희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더 해봤자 실수할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입은 열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너도 최고라고. 내 마음 알지?" "그래서, 남편은 뭐 하고 있었대?" 노영희는 안영희의 말에 작은 끄덕임을 보이고 주제를 틀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편과 주인공의 성격 차이야. 물건을." 안영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노희영이 입을 열었다. 길게. "물건을 아무 데나 두는 사람과 물건을 정해진 곳에 두는 사람이 있겠네. 주인공은 아무 데나 둘 거 같아, 충동이잖아. 그걸 주인공은 '대비'라고 생각하겠지.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남편은 그걸 '혼란'이라고 여길 거야. 항상 정리된 삶을 살아와서 그런 건 처음이겠지. 그래서 이끌렸겠지, 그런데 끝이 났을 거야. 끝내는 것도 자신에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웠을 거야. 너 알지, 나 숲은 툭툭 내뱉어도 나무는 잘 못 심는 거. 네가 나머지 묘사해 줘." 노희영의 실력이 이전에 만나서 소설 이야기를 나눴을 때보다 훨씬 는 것을 느끼며 안영희는 자존심이 살짝 상했다. 자신은 허드레일이나 하는 사람 취급하는 기분마저 느꼈다. 살짝 찡그려진 미간을 들켰을까 봐 안영희는 마음이 초조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잊어버리지 않게 적어보자, 노트 여기." 안영희는 자신의 아이디어 노트를 주고 화장실로 걸어갔다. 노희영이 보기에 그 걸음은, 종종걸음으로밖에 안 보였다. 노희영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급한가.' 뭐가 급한지 몰라도, 노희영은 자신이 이겼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밀어져 있던 노트를 다시 안영희의 자리로 밀며 말했다. "잊어버릴 리가. 내 인생은 라이프 오브 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