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세상을 16개월 밖에 살아 보지도 못한 정인이가 양부모의 폭력에 생명을 잃은 것이다. 병원에 실려왔을 당시 두개골에 금이 가고 내장까지 파열되어 있었고, 사건보다 훨씬 이전에 발생한 골절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정인이가 우발적인 폭행이 아니라 장기간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되다 끝내 숨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참사에 놀란 어른들이 ‘#정인아_미안해’ 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는 챌린지를 시작했다. 이 해시태그와 챌린지는 이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무엇에 대해 미안하다는 것일까? 여기 참가한 어른들이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미안한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어린이에게 잘못된 행동을 할 어른이라면 그런 챌린지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며, 오히려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어린이에게 가장 미안함을 덜 느껴도 되는 편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미안함을 느꼈다면 그것은 어린이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양육해야 할 사회의 어른으로서 느끼는 공동의 책임감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미안함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감이다. 정인이의 끔찍한 죽음이 개인적인 참사가 아니라 사회적 참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건은 양부모의 잔인함과 폭력성에서 비롯된 참사가 아니라 ‘친권자’에 의한 아동 폭력 앞에 무기력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 나아가 ‘친권’ 앞에서 어린이의 ‘인권’이 유린당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제도적 공백이 고스란히 노출된 사회적 참사다.
문제는 언론이다. 언론은 다른 사회적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정인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소비했다.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고, 그 악인의 악행을 자극적으로 전시하고, 악인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다시 조성된 여론에 편승하고 이를 재생산 하는 흐름을 만들었다. 이런 흐름이라면 ‘#정인아_미안해’ 해시 태그와 챌린지는 다만 착한 개인들의 마음 표현, 좀 더 삐딱하게 바라보면 착해 보이려는 유행이 되어버리고 만다. 버킷 챌린지가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얼음물 세례를 받고 괴로워하는 유명인을 소비하는 것으로 전락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정인이 양부모는 비난 받아 마땅한 악인들이다. 그리고 그 정도로 끔찍한 아동 학대 범죄가 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사례 말고도 해마다 2만건이 넘는 아동 학대가 신고된다. 신고 된 게 그 정도이며 은폐되는 건은 더 많을 것이다. 이 많은 아동학대가 모두 특별히 사악한 개인의 인성 때문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악마들이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정말로 ‘헬’ 조선이란 말인가? 아니면 뼈가 부러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가 아니라면 어린이에 대한 폭력은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있다는 뜻인가?
아동학대는 특별히 악마같은 사람이 저지르는 특별히 가혹한 행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약자인 어린이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대신 군림하고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마음을 먹는 순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범죄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크고 작은 악마가 숨어 있다. 그러니 특별히 악독한 사람을 찾아 비난하는 것 보다는 우리도 때로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아동 학대를 막을 수 있는 첫 걸음이다. 하나의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려면 모든 시민이 기꺼이 그 통제와 제한을 받아들이겠다는 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동 학대를 특별히 사악한 사람의 잔인한 행동으로 생각해 버리면 그런 일반적인 제도 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형량을 엄하게 만들자는 쪽으로 여론이 흘러버리고 만다.
하지만 정인이 때 뿐 아니라 참사가 발생할 때 마다 언론은 늘 그런 쪽으로 여론을 흘려버렸다. 차분하게 사회적인 성찰과 개선의 전망을 제시하는 쪽 보다는 빠르게 클릭수 올리기에 몰두했다. 특별히 나쁜 사람을 찾아 손가락질 하며 모든 잘못울 뒤집어 씌우고, 독자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조금씩 나누어 감당해야 할 참사에 대한 책임감을 집단적으로 면탈시켜주는 그런 기사들이 쏟아졌다. 심지어 “저렇게 어린 아이가 친부모를 떠나야 하다니” 같은 식의 선정적인 논조를 전개하면서 양부모는 친부모만큼 자녀를 사랑할 수 없으며 잠재적인 아동학대 가해자라는 선입관마저 퍼뜨렸다. 오죽했으면 대통령 마저 그런 식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말실수로 물의를 일으켰을까? 덕분에 수많은 선량한 양부모들의 가슴에 못이 박히고 말았다.
정말 평범한 사람도 아동 학대 가해자가 될 수 있을까? 보건복지부의 <아동학대 주요통계 (2018년)>를 보면 한 해 동안 신고된 아동 학대 사례 중 거의 80% 이상이 친부모, 그리고 나머지 20%는 위탁 양육자(보육기관이나 교육기관 종사자)나 친인척에 의한 것이다. 양부모에 의한 아동 학대는 아홉 건으로 친부모의 1/200에 불과했다. 물론 친부모가 양부모 보다 훨씬 많을테니 숫자를 직접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겠지만, 적어도 친부모 슬하가 결코 아동 학대의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오히려 친부모가 가하는 아동 학대는 양부모에 비해 은폐되어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어린이에 가해지는 폭력과 여기서 비롯되는 참사는 친부모, 양부모를 가리지 않는다. ‘친권자’가 어린이에 대해 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 그리고 힘이 폭력이 되었을 때 이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의 취약함이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아동 학대 참사가 나올 때 마다 이 참사를 분노와 비난, 혹은 이를 통한 안도감 확인용으로 소비하면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가려지고 아무것도 개선하지 못한 채 감정만 소비하고 만다. 그러면 참사는 반복되고, 그 때마다 ‘미안해’라 쓰고 실제로는 누군가를 악마로 만들어 비난하는 일도 반복된다. 학생이 부모에게 감금당해도, 여행용 가방에 갇혀도 늘 그때만 비난이 쏟아졌을 뿐 달라진 것이 없었음을 상기하자.
이번에야 말로 정인이에게 제대로 미안해 하자. 친권이 결코 어린이의 인권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 앞에 친권도 예외가 되지 않도록 법률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심 어린 미안해 하기다. 정인이 뿐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하여 사회적 참사가 일어날 때 마다 우리는 “누가 제일 나쁜 사람이냐?”를 찾는데 너무도 많은 에너지를 쏟아왔다. 애초에 나쁜 사람이 책임질 위치에 있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 그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나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를 체계적으로 마련하는 쪽으로 관심을 확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인아_미안해’ 해시태그와 챌린지가 주는 의미가 크다. 특별히 나쁜 사람을 찾아 비난하는 대신, 우리 각자가 언제든지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2021년은 정인이에게 제대로 미안해 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