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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Feb 13. 2021

나는 왜 말하는가? 나는 왜 쓰는가?

글을 쓰고 싶은 당신에게 (3)

지난 두 번의 포스팅을 잠깐 정리해 본다. 글이란 생각을 텍스트로 옮기는 것이며,  글을 쓰려면 키보드와 모니터를 노려보기 전에 우선 생각부터 가다듬어야 한다. 이  생각은 그저 머리에 떠오르는 상념이 아니라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사용하는 행위, 즉 사유라야 한다.  꾸준히 사유하고, 그 사유의 결과를 어떤 형식이로든 기록한다면 이미 글쓰기의 절반은 끝난 셈이다. 기록이 반드시 텍스트일 필요도 없다.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고, 다이어그램으로 그릴 수도 있다. 혹은 녹음기에 육성으로 남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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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까지 해도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며 하소연하는 분들이 있다. 어디 글뿐일까? 말조차 그렇다.  머리 속에서는 온갖 멋진 생각들이 샘솟는데 막상 입 밖으로는 엉뚱한 말만 하고 상황이 한참 지나간 다음에야  "아, 그때 이런 말을 했어야 하는데!" 하며 이불을 걷어찼던 경험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글의 경우는 좀처럼 생각을 텍스트로 옮기지 못하며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이 마비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일단 사유를  충분히 제대로 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이런 경우 원인은 이거다. 

 

글을 '잘' 쓰려고 했다. 혹은 말을 '잘' 하려고 했다.
글을 쓰고 말을 하는 목적이 불순하다. 


여기서 '잘'이라고 따로 인용부호를 붙인 것에 주목하자. 글을 잘 쓰고, 말을 잘 하려는 게 뭐가 문제인가 싶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잘'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잘'의 의미다. 


만약 글을 잘 쓴다는 것이 자신의 생각, 자신의 사유 결과가 최대한 선명하게 드러나서 효과적으로 전달되도록 말하고 쓰는 것이라면 이 '잘'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말하고 글 쓰는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특히 글 쓰는 것을 더 쉽게 여긴다. 말은 일단 나와버리면 담을 수 없지만, 글은 발표하기 전에 몇번이고 고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글로 옮겨 놓고 여러번 고쳐 읽어가며 자신의 생각에 가깝도록 글을 다듬어 가면 된다. 이는 마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때  일단 형태를 잡아 놓은 다음에 그릴 대상과 비교해 가며 세밀하게 다듬어 완성하는 것과 같다.


글을 쓰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다듬는 방법과 정도가 달라진다. 글을 쓰는 목적은 대체로 다음 둘 중 하나다. 


1. 내 생각 혹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이런 목적으로 쓰는 글이라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 정보와  글이 최대한 일치하도록 다듬어 나가면 된다. 빠진 것이 있으면 집어 넣고, 굳이 필요하지 않은 단어나 문장은 삭제한다. 일단 생각 나는대로 다 써 놓은 뒤  삭제하면서 다듬는 것이 편리하다. 


2. 나의 느낌, 감정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낸다.

이 경우에는 내 생각을 그대로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이런 글은 몹시 쓰기 어렵다.  "나는 그것을 보고 몹시 슬펐다."라는 문장을 보고  슬픔에 공감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 경우에는 나의 감정, 느낌을 그대로 서술하기 보다는 나의 감정과 느낌을 불러 일으켰던 상황, 대상을 독자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이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것 보다는 적절히 감추고 드러내고, 요소들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드러내는 것이 좋다. 이것은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 '기법'을 통해 감동을 끌어내려 애를 쓰며, 이 기법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작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법만으로는 어떤 감동도 끌어낼 수 없고, 설사 끌어낸다 하더라도 금새 질리게 만들 뿐이다. 세상에 널려있는 3류 멜로물이라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진정성'이다. 진정성이란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해 기쁨이나 슬픔 혹은 감동을 느꼈을 때 그 과정을 충실하게 되돌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 말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그래서 꼭 이 느낌을 공유하고 싶은 것들이 충분히 떠오를 것이다. 만약 떠오르지 않는다면 당신은 느끼지 않았고, 감동하지 않은 것이며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도 이런 글을 잘 쓰는 것은 아니다. 이런 글은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기법으로 거짓 감정을 이끌어내는 '조작'물을 쓸 수 있을 뿐이다. 물론 그런 기법에 능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작가가 아니다. 다만 글쟁이일 뿐이다.  


굳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고 공감을 얻는 글을 쓰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내 생각과 정보를 정확히 전달만 해도 충분히 훌륭한 글이다. 사실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글쓰기가 어렵다는 사람들은 글을 '잘' 쓴다는 것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잘 썼다고 하는 글과 비슷해지고자 한다.  이럴 경우에는 두 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생각과 글 사이에 노이즈가 되어 글쓰기를 방해한다. 


하나는 '글을 잘 쓴다'는 평가를 받고, 인정을 받고, 독자를 모으고 싶은 욕망이다. 이런 욕망이 앞서다 보면 '진정성' 보다는 '기법'에 매달리게 되며, 문장은 게속 진행되고, 페이지는 꾸역꾸역 채워지는데, 도무지 글이 되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  재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목적이 잘못된 것이다. 


글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과시할만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 이런 불순한 의도로 글을 쓰면 장황한 글이 되지만, 가진것도 없는데 과시욕만 드높은 사람이라면 말만 요란할 뿐 글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다.  어쩌다 쓰더라도 앙상하기 짝이 없는 글, 어디선가 본듯한 칭찬받기 쉬운 관용구로만 가득찬 그런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글을 잘 못쓴다'는 평가를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내 생각을 얼마나 온전히 글에 담아낼까 보다는 어떻게 멋드러진 모양을 내서 쓸까, 어떻게 써야 사람들이 보고 비웃지 않을까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원래 쓰기로 마음 먹었던 생각이 달아나 버리고 눈 앞에서 커서만 깜박거리게 된다.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글쓰기를 억압하는 것이다.  아무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며 변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반대다. 


 이 억압은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내 생각을 정확하게 글로 옮기기만 하면 사라진다. 용기가 있어야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용기가 생긴다 

 

자, 이제 깜박이는 커서를 노려보지 말고 스스로의 마음을 돌아보자. =생각이 충분한데도 글이 잘 써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글을 왜 쓰는지 목적을 돌아보자. 혹시 그 목적에 '진정성'이 결여된 노이즈가 낀 것은 아닐지 돌아보자. 물론 그 노이즈를 제거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 노이즈들은 대체로 세상의 성공, 세상의 평판과 관련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된 성공, 거짓된 평판은 결국 언젠가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며, 무엇보다도 스스로 그것이 거짓되었음을 의식할수 밖에 없기에 영원히 불안하고 불만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글을 쓰면 쓸수록 불행해진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글이라면 차라리 쓰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글은 나를 위해 쓰는 것이지 남의 눈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며, 그 글을 써서 얻게될 무엇인가를 위해 쓰는 것도 아니다. 


자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렀다면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의 커서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이 훨씬 앞서 달리는 것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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