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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r 09. 2021

일본 아저씨

여기서 말하는 아저씨는 남자 연장자를 일컫는 오늘날의 의미가 아니다. 숙부나 백부 뻘 되는 어른을 부를 때 사용하는 원래 의미의 아저씨다. 그러니  일본 아저씨는 일본 사람이 아니라  일본에 계신 아저씨로, 아버지의 사촌형님, 즉 나의 당숙을 일컫는 말이다. 단 두번 만나 뵈었을 뿐이고, 성함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 불러 드릴 방법이 없다. 내가 여섯 살 때 이미 어른이 된 아들이 있었으니, 지금 살아 계신다면 90을 훌쩍 넘기셨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돌아 가셨을지도 모르겠고. 


우리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물론 양반이라고 주장하기는 한다. 설사 그걸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다자이 오사무가 봤다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사양”이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히 몰락한 상태였다.  다행히 아버지는 “인간 실격”은 당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학을 해 가며 서울 법대를 다니고 금융인으로 성공하면서 가난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하는데 그건 아버지쪽 주장이고, 실상은 금수저 집안의 사위가 된 것이 더 결정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집안 어르신들 중에 중산층 근처라도 가 본 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상당수가  6.25때 인민군을 따라 갔다고 한다.


이런 가난이 지긋지긋했던 분들 중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50년대 후반 일본은 전쟁의 폐허에서 벗어나 경제가 부흥기에 접어 들었을 무렵이라 일자리도, 기회도 풍부했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전쟁으로 남아난 것이 없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일본 아저씨도 그때 무작정 건너갔다. 그렇다 한들 무슨 번듯한 일을 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대다수 재일교포들이 그러했듯 작은 음식점이나 잡화점을 목표로 삼아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잡화점 하나를 차렸을 때가 1960년대 후반.  이미 40줄에 들어선 다음의 일이다. 거기서 일본인 아내를 얻고, 아들도 낳았다.


1974년 마침내 일본 아저씨가 나름 금의환향을 했다. 그리고 우리집도 찾아왔다. 그 분이 일본에서 얻은 부인과 아들도 함께 왔다. 그 아들이 나하고 비슷한 또래였다. 이름이 조지인가 뭔가 그랬던 나의 재종제는 한국어를 한 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우리는 무척 잘 어울려 놀았다. 서로 알아 듣지 못하는 말을 주고 받았지만 의사소통에 문제가 되었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하지만 진짜 신기한 것은 말이 아니라 그 녀석이 가지고 온 온갖 장난감들과 학용품이었다. 


그때 나는 난생 처음 미니카라는 것을 봤다. 이렇게 조그만 자동차라니. 당시 우리나라 기술력으로 이렇게 작고 정교한 장난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톰보 연필도 이때 처음 봤다. 아무리 힘주어 써도 굵고 진하게 써질 뿐 부러지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만약 한국산이었다면 연필이 안 부러지는 게 신기했던 시절이다. 심지어 샤프 펜슬이라니? 심이 자동으로 나오는 연필이라니? 그건 거의 마술이나 다름없었다. 건전지로 달리는 신칸센 기차 모형도 감탄을 연발하게 만들었다. 마루 바닥에 플라스틱 선로를 펼쳐 놓으면 그 위로 신칸센 열차가 달렸다. 그 멋들어진 열차 모습이라니. 


그런데  일본 아저씨는 우리집을 보고 놀랬다. 명색이 서울법대 출신의 국민은행 대리고 나름 부잣집 (데릴?) 사위가 사는 꼴이 영 그래 보였던 것이다. 사실 나이 서른 넷에 이미 마당에 분수까지 있는 양옥집까지 가지고 있는 당시 기준으로는 중상층에 속했지만 일본에 살다 온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딱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가난한 집안에서 배출한 유일한 수재였는데, 그래도 외국까지 가서 나름 성공한 집안의 어른이 뭔가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며칠 뒤 일본 아저씨는 돌아갔다. 미니카도 신칸센도 톰보도 샤프펜슬도 다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한달 뒤,  일본에서 엄청난 짐꾸러기가 왔다. 어찌나 물건이 많이 왔는지 세관에서 압류한 뒤 아버지를 소환할 정도였다. "당신 뭐야? 밀수하는 거야?" 대충 이런 분위기. 세관원은 자초지종을 다 듣고(혹은 뇌물을 먹고) 한참 고민하는 척 하더니 결국 물건을 내어 주었다. 


용달차에 짐꾸러미들을 때려 싣고 집에 왔다. 일본에서 짐꾸러미가 왔다고 하니 서울에 살던 친척들이 다 몰려와서 마치 흥부가 박을 썰기라도 하는양 멀뚱멀뚱 구경들을 했다. 하나하나 풀어볼때 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물건들이 나왔다. 


히다치 냉장고가 나왔다. 당시 나는 히다치 냉장고는 커녕 냉장고 자체를 집에 두고 쓰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 그 때는 동네 식료품 점에서도 아이스크림(하드)를 냉장고가 아니라 얼음 주머니에 보관했고,  '어름집'이라는 간판을 단 가게에서 얼음을 따로 사서 먹던 시절이었다. 그 히다치 냉장고는 어찌나 성능이 좋고 견고했는지 이후 26년간 계속 집에서 사용하였다. 코끼리 전기 밥솥이 왔다. 코끼리는 커녕 전기밥솥이라는 거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톰보 연필이 한 무더기 왔다. 연필깎기와 함께. 애석하게 샤프는 오지 않았다. 연필깍끼라는 물건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연필을 칼로 깎는 대신  레버를 빙글빙글 돌리기만 하면 칼로 깎은것 보다 훨씬 날카롭게 깎이는게 신기하여 동네 아이들이 다 몰려와서 연필을 깎았다. 그 밖에도 너무도 잘지워져 소름이 돋을 정도였던 지우개, 태엽으로 움직이는 미니카, 아아아아, 신칸센 기차 세트. 


이런 것들을 보면서 어른들이 한편으로는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 반, 비꼼 반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봐라. 하여간 일본놈들은 물건을 얼마나 잘만드는지. 우린 하늘이 두 쪽나도 못 따라 간다니까. 그러니 너희들이 정신 바짝 차리고 공부 해야지, 안 그러면 일본놈들한테 나라 또 빼앗긴다."


그랬다. 그때 우리나라와 일본의 격차가 딱 이랬다. 구멍가게 하나 운영하는 사람이 최고 금융기관의 "언젠가 은행장 될 사람" 소리를 듣던(결국 못되었지만) 엘리트 사원을 보고 사는 꼴이 불쌍해 보여 세간 살림을 보태주고, 그 은행원의 아들이 일본에서라면 평범한 물건들이었을 장난감과 학용품을 쓰면서 거의 신천지를 경험했던. 국산과 일제 사이에 넘사벽이 놓여 있었던. 미국이 말려서 망정이지 일본이 한국을 다시 먹겠다고 들면 어린애 손목 비틀기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지금 학생들, 젊은이들이 느끼는 일본은 어떨까? 아마 그리 큰 격차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격차를 느끼지 못하니 경계할 이유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안 느껴서 현실적으로 분명히 남아있는 격차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대할 수 있다. 어쩌면 *86 세대의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일본관과 반일감정은 역사 따위가 아니라 어린 시절 느낀 격차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문득 야구에 비유하고 싶어진다. 1982년에는 일본 리그에서 퇴출 직전의 투수나 패전처리 투수가 와서 20승 이상씩을 하고 그랬다. 일본에서 한 물 간 타자가 와서 감독을 겸직해 가면서 4할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메이저 리그 출신이 와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한다. 1할대 타율을 기록하다 퇴출되기도 하고, 10승도 못 건지고 재계약에 실패하기도 한다. 


갑자기 웅장해진다. 아, 그렇다고 국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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