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386 시대의 추억
1989년 여름의 이야기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여름방학의 가장 큰 행사는 해외여행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농촌봉사활동, 줄여서 농활이었다. 7월 중 2주 정도 각 대학별로 지역을 할당하여 농촌에 들어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다. 순수하게 봉사활동만 하러 간 것은 아니었다. 현지 지역 사회 운동, 농민 운동과 학생운동의 연대를 형성하여 농촌 사회를 의식화 한다는 나름 맹랑한 목표를 가지고 실시한 일종의 민중연대 활동이다.
말은 그렇지만 실제로 연륜 있는 농민들이 "아이고 많이 배운 학생들이 하는 말잉게 우리가 배워야제 잉?" 이러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대개는 이 활동을 계기로 1학년 학생들을 의식화 한다는 목표가 더 컸다. 농촌의 가난과 모순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투쟁과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가난 포르노 아니냐고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이런 목적이 있었기에 농활은 바로 농촌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2박3일간 합숙하며 사전 학습을 하고 9박 10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면 다시 1박2일의 정리학습을 하는 꽤 복잡한 구성으로 일정을 잡았다.
요즘 같으면 한 학교 전체에서 100명이나 갈까 말까 하겠지만, 당시 농활 참여율은 매우 높았다. 특히 서울대학교는 다른 대학교 보다 훨씬 참여율이 높아서 단과대학 하나에서 참가하는 학생들이 웬만한 대학교 참석자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래서 다른 대학들은 대체로 군 하나씩을 담당했지만 서울대학은 도 하나를 홀로 담당하고, 단과 대학별로 군 하나씩을 할당했다.
당시 서울대학교가 담당한 지역은 OOO도였고 사범대학은 그 중 OO군을 담당했다. 당시 나는 사범대 학생회의 민중연대사업부장을 맡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한다거나, 달동네에서 철거민이 항거 한다거나, 혹은 전노협(민주노총의 전신)에서 집회를 한다거나 하면 학생들을 모아 지원 투쟁을 나서는 좀 험한 보직이었다. 그런 일이 없는 평화(?)시에는 노동조합 간부들과 투쟁과 조직화를 모의하면서 혁명의 그날(!)을 예비하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완전 빨갱이였다.
농활 역시 민중운동과의 연대사업이기에 나는 OO군 농학연대 위원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직책을 받고 OO군 전체의 농활을 총괄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사범대학 농활대장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 없는 일이다. 농촌이라고는 거의 가 본적도 없는, 심지어 좌식 변기가 아닌 곳에서는 일도 못 보는 강남 샌님이 농활대장이라니.
이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400명 이상의 학생들이 보름간 이동하는 일이다. 2박3일간 합숙하며 사전 학습을 할 장소, 그 장소까지 이동할 교통편 확보, 다시 그 장소에서 OO까지 이동하는 교통편 확보, 학생들을 10-15명 단위의 소조로 편성하여 투입할 마을들 15개 내외 섭외, OO군 농민회장과 각 마을 청년회나 농민회 대표들과의 사전 조율, 정리학습 할 장소와 귀경 교통편의 확보, 이 과정에서 필요한 군청, 군경찰서, 각종언론사 등과의 사전 조율 및 협조요청 등등 정말 일이 산더미였다. 더구나 그 시절은 인터넷은 커녕 피시통신도 휴대전화도 없었고 팩스도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이 모든 일을 유선전화로 통화하거나 직접 현지를 오가며 처리해야 했다.
사전 합숙 장소는 OO사 집단시설지구로 정했다. 서울에서 OO군까지 가는 길목에 수백명이 한꺼번에 합숙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그러면서 풍광도 좋은 곳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음에 할 일은 직접 OO사까지 가서 그 일대 민박집들을 뒤져가며 방 20개를 확보하고 계약금을 납부하는 일이다. 다음에는 OO사에서 OO군으로 들어가는 교통편과 소요시간을 직접 확인한 뒤, 그 경로로 직접 이동하고, 현지 농민회와 회의를 거쳐 각 마을별로 투입될 학생 소조(대개 학과 단위로 편성)들의 매칭 작업을 했다. 물론 각 마을에도 직접 가서 현지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을 노인들이 "이 빨갱이 새끼들" 그러며 쫓아 낼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어르신들을 찾아 인사도 드리고(아 적성에 안 맞아).
다음은 정치활동이다. 군청을 방문하여 군수와 만나서 읍에서 데모 같은거 안한다, 대신 협조 부탁 드린다, 아니 방해만 하지 말아달라 등등 이야기 하고, 현지 경찰서장도 만나서 조용히 봉사활동하다 갈테니 건드리지 말라, 만약 건드리면 시골 전경들이 어디 서울대학생들 데모하는거 막을 수 있나 보겠다며 적당히 얼르기도 하고. 아 성당도 방문해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와 협력을 약속하고 등등. 다음은 정리 학습 장소를 섭외해야 하는데, 서울로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XX대학 캠퍼스를 빌릴 작정이었기 때문에 공주대 총학생회를 방문하고, 또 총장도 만나고.
이 모든 것을 직접 다니면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최소한 3박 4일의 출장이 필요했다. 지금 생각하면 겨울 스물 두살 짜리 청년이라기 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녀석이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했나 싶다. 하지만 그때는 그랬다. 조로를 강요받은 시대였으니. 하지만 한 눈에도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비서(?) 아니 보좌관(?)이 수행하면서 많이 도와주었다. 당시 나에게 배당된 보좌관은 1년 후배인 88학번 여학생이었다. 그 후배는 자기가 보기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에 정통하고 능숙능란한 선전물을 제작하는 나를 ‘몽이 형’(당시 나의 암호명이 도라에몽이었음: 진짜 무슨 지하 혁명당 흉내는 다 내고 다녔다)이라고 부르면서 무척 따랐다.
그렇게 21, 22살 청춘 남녀가 3박4일간 출장을 떠나게 되었다. 요즘 같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잠자리였겠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출발 전에 둘이 만나 사전 모임을 몇 차례나 했지만, 매번 농민회, 관련 단체, 한겨레 신문 보급소, 그 지역 전교조 지회, 사전학습 자료제작 등등의 이야기만 했지, 밤에 어디서 어떻게 잘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농민회장이 읍내에 있는 사무실에 잠잘 수 있는 곳 있으니 숙박비는 따로 들지 않을 거라 했고, 그냥 그 말을 믿었다.
출장 첫날, OO사를 들러 민박집 다섯 군데의 방을 싹쓸이 예약하고 다시 몇 번씩 버스를 갈아타며 OO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무렵이었다. 당시 고속도로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비포장도로마저 많아서 그날 하루만 버스를 다섯시간 넘게 탔다. 그래서 농민회 간부들, 정의구현 사제단 신부님 등과 가진 저녁 식사와 술자리조차 너무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었다.
겨우 겨우 농민회 사무실의 숙소로 자정이 다 되어서 와 보니, 사용할 수 있는 방이 있기는 했지만 달랑 한 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인데, 당시 나도, 그 후배도 "아니, 방이 한 칸 뿐이잖아?" 이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와 방이 생각보다 넓다. 오늘은 편히 자자." 이 생각 밖에 안했다. 더구나 농민회 간부가 음악 애호가였는지 방에는 LP 플레이어와 레코드 판들까지 있었다. 심지어 클래식. 그 중 폴리니가 연주한 베토벤 피아노협주곡이 있어서 올려놓고 들었다.
당시 운동권 학생의 문화수준은 부박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클래식 듣는 남자 운동권은 희귀동물이었다. 그 후배는 클래식에 대해 이거 저거 물어 보았고, 우리는 베개를 나란히 하고 누워서 음악을 듣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 했고, 그러다 누가 먼저인지 모르게 잠들었다. 그리고 여기 장소가 위치도 좋고 방도 괜찮고 취사도 가능하니 농활기간 동안 본부로 사용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모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농활이 이루어지는 10일간 이 방을 둘이 쓰겠다는 말인데, 거기서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활동"에 몰두해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후배의 마음은 안 들어가 봤으니 모르겠다. 같은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그런척 한 것일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