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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r 23. 2021

새로운 시대에 요구되는 새로운 교육운동

14년 전에 썼던 "문건"

제목 보고 오셨다면 낚이셨다. 이 글은 새로운 이라는 말이 무색한 14년 전에 쓴 이른바 운동권 '문건'이기 때문이다. 다만 보존을 위해 이렇게 올려둔다. 물론 읽는 사람이 있다면 나쁘진 않고.


나도 왕년에는 이렇게 프랑스 좌파 철학 들먹이며 현학적인 글을 썼었다. 아무래도 그건 30대 후반의 특성인 모양이다. 문제는 14년 전에 썼던 글이고, 그때 던진 문제이고 화두인데, 지금 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때가 더 희망이 있어 보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보면 나 같이 오랜 시간 활동한 사람이 전향도 좌절도 혹은 화석화도 되지 않고 어쨌든 계속 업데이트 해 가며 남아 있는 것만도 용하다. 결국 운동은 세상을 바꾼 것이 아니라 나를 바꿔가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야 어찌 되건 말건, 나는 나의 길을 간다. 그 길은 고정된 길도 아니니 고집 세울 이유도 없다.


아, 요즘은 이 프랑스 패션 좌파 철학은 덜 읊조린다.


이문건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음, 다시 읽어보니 나 엄청 급진주의자였다. 그런데 이 시절 나의 이런 관점과 비슷한 입장을 취했던 나름 셀럽들이 2019년에는 몽땅 조국기를 흔들고 있었다. 그 패션 좌파들은 운동권 동문회에 불과하면서 급진주의자 인척 사기를 쳤던 것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상부구조에 결정적인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우리는 생산수단의 놀라운 변화를 목도하였다. 바로 정보통신 혁명, 추상적이었던 지식과 정보가 그 자체 부의 원천이 되어버리는 변화가 그것이다. 당연히 이런 생산력의 변화는 생산관계를 바꿀 것이고, 상부구조인 교육

에도 엄청난 변화를 던져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 변화는 낡은 생산관계, 낡은 상부구조와 모순을 일으킬 것이고, 이 모순은 구체적으로 사람들의 고통으로 현상할 것이다. 누가 이 고통의 목소리를 잡아내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운동의 결정

적 동력이 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진영은 이 기본을 잊고 있었고, 이 변화로 인한 고통의 지점을 잡아내는데 실패하였다. 오히려 자본이 한 발 앞섰다. 이들은 케인스주의에 기반한 국가자본주의를 새로운 생산력의 걸림돌이 되는 낡은 생산관계로 공격하면서, 고통의 지점으로 지식과 정보에 기반한 창의적인 노동자와 그를 얽어매는 각종 관료제적 규제와 통제, 획일화를 잡아내었다. 이 흐름을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하고 네그리는 보다 폭넓게 제국이라고도 부른다.

반면 진보진영은 케인즈 국가(앙시엥 레짐)의 옹호자로 나서면서 오히려 진보성을 잃어버렸다. 신자유주의가 낡은 생산관계의 파열구인 비대해진 공공영역의 비효율과 사회 전반을 옥죄는 답답한 관료제를 공격할 때, 진보진영은 오히려 각종 규제와 관료제, 국민국가를 옹호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진보에 대한 재앙에 가까운 지지율과 영향력을 조중동의 농간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옳건 그르건 간에 신자유주의는 21세기의 모순점을 두드렸다. 진보진영은 거기에 구시대적으로 저항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타격점에 대해 더욱 강력한 공격을 가함으로써 신자유주의의 위선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해야 하며, 획일성과 최악의 관료제를 해소시킬 진정한 힘이 왼쪽에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어디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즉 운동의 주체성을 찾아내지 못하였다. 이것 역시 자본이 더 빨랐다. 드러커는 “산업 프롤레타리아는 사라지고 이제는 지식노동자의 시대”가 왔다고 선언한다. 이제 대규모 공장에서 치열하게 대립하던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은 점차 소수의 지식노동자와 다수의 분산적인 맥잡으로 대체되고 있다. 전통적 진보진영의 세력기반인 산업 노동조합들은 그 재료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드러커나 벨의 주장처럼 정말 노동자들은 사라지고 자유로운 지식 소생산자들의 세계가 온 것인가? 아니다. 노동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공장 밖으로 나갔을 뿐이다.


2. 비물질 노동의 시대

중세에는 농업이, 근대에는 산업이 중심이었다면 정보화 시대에는 무엇이 생산의 중심인가? 흔히 지식·정보 산업, 서비스 산업이라고 말한다. 혹은 정신노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근대의 용어다. 산업혁명 이후의 농업이 농업이라기보다 식량산업이듯, 정보혁명 이후의 산업은 설사 육체노동이라 할지라도 이전과 다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바로 비물질 노동이다.

비물질 노동은 지식·정보 노동, 상징 노동, 그리고 정동(情動) 노동을 통칭하는 말이다. 지식·정보는 오늘날 그 자체 생산물이며 가치의 원천이 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지식·정보의 흐름을 관리하는 상징 노동의 위상도 매우 중요해지며 그 자체 가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노동은 지식·정보 기계의 발달과 함께 사라지고 축소된다.

오늘날 가장 인간적인 노동으로 남는 것이 바로 정서 노동이다. 과거에는 정서가 매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제는 정서 그 자체가 상품이다. 여기에는 감정노동, 엔터테인먼트, 서비스, 그리고 care노동 등이 포괄된다. 심지어 물질을 생산하는 노동조차 궁극적으로는 정동이다. 오늘날 지식·정보·정동을 생산하지 않는 그야말로 물질 노동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점점 주변화, 최소화되고 있다. 물질은 기계가 다루고 인간은 지식과 정동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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