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386이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교사 Dec 29. 2020

독어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슈베르트라니

386의 시대 정신

벌써 33년 전의 일이 되었다. 1987년 3월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새내기 대학 1학년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당시 대학 신입생에게는 선배들이 마련하는 신입생환영회 자리가 몹시 두려운 자리였다. 아니 신입생을 환영해 준다는데 뭐가 두렵냐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1987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 숫자만으로도 많은 것이 설명되던. 당시 신입생들은  어른들로부터선배들이 신입생을 의식화 하여 운동권으로 만든다는 식의 사전교육을 잔뜩 받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니 다정하게 다가오는 선배들을 마냥 고맙게 맞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도망갈 핑계도 기회도 찾지못해 마지못해 ‘끌려간’ 신입생 환영회. 당시 대학생 놀이 문화는 뽕짝이 난무하는 아재 문화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일단 밥과 술이 돌고, 술잔이 돌고, 다들 술기운이 불콰하게 오르면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요즘 같았으면 2차로 노래방을 갔겠지만, 그때는 노래방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술집에서 생 목소리로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를 반주 삼아 노래를 불렀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몹시 곤혹스러웠다. 신입생이니 당연히 운동가요는 알 턱이 없고, 그렇다고 대중가요도 아는 곡이 거의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할때 까지 나는 음악이라고는 클래식 밖에 안 들었다. 이문세, 송창식 등의 노래도 어디서 들려오면 “아 어디선가 들어본 노래군” 할 정도지, 불러본적도, 따로 신경써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묘안이 떠올랐다. 명색이 “독어교육과” 아닌가? 그러니 독일 노래를 부르면 되겠다. 그래서 내가 외워서 부를 수 있는 독일 노래를 머리속으로 검색했다.

“들장미”  이건 너무 흔하고. 그럼 뭐가 좋을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슈베르트의 “봄의 믿음”(Fruelingsglaube)”였다. 어떤 노래인지는 다음 유튜브 링크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물론 나는 이렇게 부르지는 않았(못했)고.

그런데 노래를 다 부르고 나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요한한 박수나 혹은 신입생이 독일어를 제법 하는데 하는 감탄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독어과 선배다운 반응 정도는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가령 “너 움라우트 발음이 엉망이야” 라거나 “너 뜻은 알고 부르냐?” 라거나? 하지만 내가 노래를 마쳤을때 선배들의 반응은 “싸함” 그 자체였다. 뭐지 이런 반응은?


그때 85학번 선배 하나가 천천히 무게 잡고 다가오더니(지금 어디서 사교육업 하고 있다) 눈썹을 접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거, 왜 좋은 우리 노래 냅두고, 이런 제국주의 외세의 노래를 부르냐?”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 접은 눈썹 사이에서 “이 종간나 반동분자. 그 부르주아 문화 취향을 버리시오.”라는 호통이 숨어 있음을 느끼는데는 관심법 같은 것도 필요 없었다. 다른 선배들도 “고럼, 고럼” 하는 표정으로 고개들을 끄덕이고 있었다. 아니 제국주의 외세의 언어를 공부하는 주제에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다른 선배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구성지게 노래를 뽑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우리 민요, 외면 당하아고오~ 어찌하여 외국 팝송 판을 치이느냐~ 에헤야 디헤야, 서글픈 나라라아~ 에헤야, 디에야~ 해야 솟아라라.....”

https://news.joins.com/article/2015359


독어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슈베르트 부르고 이렇게 매도당한 느낌이라니. 정말 이해할수 없었다. 내가 범생이 출신이라면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죄송합니다 우리노래 부르겠습니다 했겠지만, 내가 어디 그런 캐릭턴가?

그런데 우린 그 제국주의 외세의 말을 공부하는 학과 아닙니까?”

이렇게 되물어보고 말았다.

하지만 선배들은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어는 제국주의 외세의 말이 아니라 마르크스-엥겔스의 말이었다는.


80년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86세대가 어떤 문화적 풍토에서 청년기를 보냈는지 그 단편을 보여주는 일화다. 과장되었다고? 놉.

“차라리 예술의 전당을 헐어라.” 라는 운동권 출신 국회의원의 치기어린 발언을 듣고  떠오른 추억 한 자락이다.


https://youtu.be/u_HRy3uZPrk


매거진의 이전글 애들 빤스, 어른 빤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