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운동권의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기억
느닷없이 웬 빤스 타령인가 싶을 것이다. 게다가 표지애 올려 놓은 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은 또 뭐고? 조금만 기다려주기 바란다. 다 이야기 해 드릴테니.
저 장면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유명한 그 노래 '에델봐이스'를 부르는 장면이다. 그냥 넘어가기 섭섭하니 일단 노래 한 번 들어보고 계속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부터 나올 이야기는 이 아름다운 노래와는 전혀 관계 없는, 아니 오히려 그 반대되는 잊고 싶은, 그러나 잊어서는 안되는 이야기다.
1980년대는 학생운동의 시대였다. 대중 운동을 지향했던 NL이건, 전위엘리트 운동을 지향했던 PD건 결국 운동권이 재생산되고 움직이는 방식은 다르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운동권 지하 써클(동아리)이었다. 겉으로는 학생회장이 지도자로 보여도 학생회장 역시 각자 소속된 정파 운동권의 중진 멤버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럼 이 정파 지하 써클 멤버들은 모여서 무엇을 할까? 출처가 불명한 각종 복사물들(이걸 문건이라고 불렀다)을 돌려보며 정세분석과 투쟁방향(투방)을 공유하고, 각종 이념 서적을 연구하며 이론무장을 단단히 했다. NL이라면 항일무장투쟁사, 주체사상이란 무엇인가(김정일 작), 김일성 노작 같은 것을 읽었을 것이고, PD라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선(공산당 선언, 공상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고타강령 비판, 임노동과 자본), 자본론 강독, 그리고 레닌의 주요 저작(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 무엇을 할 것인가,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등을 읽었을 것이다. 엔엘의 강철서신, 피디의 사사방 등은 이미 다 떼고 왔다 쳤고.
아니, 이런 재미 없는 것들만 했을까? 그럴리가 없다. 아무리 근엄한척 비장한척 지하써클 비합 반합 어쩌구 해 봐야 20대 초반의 젊은이들(나이 먹어서 보니 젊은이도 아니고 그냥 애들)이다. 결국 모여서 제일 많이 한 일은 노는 것이었고, 그 놀이 문화도 결국 학사주점이라는 곳에서 술마시고 젓가락 두드리며 노래하는(노래 종류가 좀 달랐을 수는 있지만) 아재 문화의 변종에 불과했다.
대부분 운동가요를 불렀지만, 때로는 웃자고 부르는 노래들도 불렀다. 그런데 그 웃자고 부르는 내용이 대개는 음담패설이었다. 여학생들도 같이 있는 자리였지만 별로 문제의식들을 못 느꼈고, 때로는 여학생들이 어쩔줄 몰라하거나 민망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즐거워하기도 했다. 웃는 여학우들도 있었다. 그들이 불쾌했는지 어쨌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드러내어 표현한 적이 없으니.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여성이 웃는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된 것도 거의 50이 다 되어서였으니 그때 뭘 알았겠나? 웃었으니 좋아하나 보다 그러고들 말았겟지.
그런 노래 중에 바로 이 "에델봐이스"를 개사한 "애들 빤스, 어른 빤스" 노래가 있었다. "애들 빤스, 애들 빤스, 애들만 입는 빤스, 어쩌다 어른이 입으면, 너무 작은 빤스" 이런 식으로. 한 사람이 저 영상의 아버지처럼 선창을 하면 나머지는 추임새로 다 같이 "빤스 빤스" 하고 넣어주면서 불러댔다.
만약 이 자리에 있는 몇 안되는 여학우가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굳은 얼굴을 하거나 그랬다면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다며 비난을 들었을 것이다. 좀 과장하면 "투쟁"에 나쁜 영향을 주니 "반동적"인 행위라고 낙인 찍혔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이 날 사랑함으로써 더 열심히 투쟁할 수 있다면 키스 정도는 받아줄수 있어." 라고 말하며 남자 선배의 키스에 느낌없이 입술을 대어주던 여학우가 칭찬받는 분위기였으니. 이게 제정신들이냐 싶겠지만, 그땐 그런 분위기였다. 그냥 시위 대오 따라가서 구호외치고 짱돌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 운동권의 세계는.
그래서 대체로 여학우들은 그냥 웃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당시 곱상한 얼굴, 늘씬한 몸매, 긴 생머리로 운동권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운동권 남자들도 여성 취향은 별다르지 않았다) 한 여학우가 오히려 능동적으로 이런 분위기에 주도적으로 나섰다. 노래를 선창하는가 하면 "빤스 빤스" 추임새를 엄청나게 박력있게 외치기도 했다. 그 여학우는 판소리도 잘 불렀던지라 "빤스 빤스" 추임새가 술집안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며, 남자들의 추임새를 압도했다.
그런데 엉뚱하게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미모의 여학우가 저 놀이에 불쾌감을 드러내거나 하는 대신 최대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흥을 한창 돋구어 주었는데 말이다. 한 동안 그 여학우의 추임새가 남자소리보다 크다고 느껴지더니, 남자들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고, 결국 그 여학우 혼자 "빤쓰 빤쓰" 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어쩌겠나? 그 여학우도 추임새를 멈출 수 밖에.
그리고 한 동안 침묵의 바다.
잠시후 한 남학생이 투덜대며 한 마디 던졌다.
"에이, 여자가... 참." 그러자 몇몇 다른 남학생들도 거기에 수긍하며 "여자가 좀." 이러며 한 마디씩 던졌다. 빤스 추임새를 힘차게 외치던 여학우는 너무 민망해서 막걸리 몇잔을 퍼 마신뒤 자리를 떠났다.
너무 깊이 해석하지 말자. 그냥 갑자기 떠오른 추억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