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하드 정리하다 발견한 유물. 1997년 당시 나의 철학적 난제와 이를 해명하는 과정 속에서 사회과 교육의 목표를 추구하고자 했던 나름 치열했던 사유의 한 자락이다. 물론 말로는 뭘 못하냐?
1997년 7월14일 권재원 철학테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한 지식의 획득(간 학문적 지식? 사회과의 여러 영역을 포괄하는 하드코어의 습득? 혹은 습득 방법의 획득?) + 가치판단(가치판단은 가르칠수 없다. 다만 가치판단을 하는 훈련만이 존재) = 특정한 상황에서의 (구체적인 상황) 의사결정 능력의 함양.
과학과 가치의 엄격한 분리(여전히 가치 과학의 가치중립에 대한 실증주의적 믿음)
그러나, 과학적 지식의 습득이 얼마나 많건 간에 결국은 최종적인 단계에서는 개인의 가치 판단에 의거한 의사결정. 사실상 주관적인 의사결정에 내던져지는데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란 가능한가?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획득이라는것도 사실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수 있는가? 아울러 가치의영역이라는건 순전히 주관적인것인가?
결국은 인간의 의식이 형성되고 발현되는 인식론적인 숙고 없이 이루어지는 사회과 교육은 사상누각이 아닌가?
1.지식은 자신의 존재방식의 발현 양식, 즉 여러 행위중 하나에 불과한 인식활동의 소산이다. 혹은 기껏해야 자신의 기존의 지식구조(선지식, 선이해)에 따른 세계와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2.가치는 태도이다. 인과론적으로 설명되지는 않지만 분명 나름의 원칙은 있는 판단의 기준이다.
3.이때 지식의 획득과정과 가치판단의 과정은 분리되지 않으며, 그중 하나가 어느정도 진행된 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교대로 이루어지는것도 아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가치는 지식을 물들이고 지식은 가치를 생성하거나 firming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과 상호작용을 하는 고립된 상태를 가상했을때의(사회계약론이나 롤스의 정의론에서 가정하는),최초의 인간의 최초의 인식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최초의 인식은 완전한 백지에서, 최초의 자연의 원시적 반영인가, 아니면 이 순간에도 인식의 틀이 선험적으로 마련되어있는가? 여기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이 갈라진다.
4.인식의 틀은 자연의 반영이다.(유물론) but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은 무조건 정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인식의 틀은 선험적인 도구로 주어졌다.(이른바 순수이성) but 그러면 지식의 획장과 가치의 형성, 그리고 지평의 확장은? 모든 인식은 연역에 불과할텐데...
인식의 틀이란 없다. 사람은 그순간 그슨간을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알아낼수 있다. 문제는 인식의 틀이 아니라 방법론이다.(실증주의) but 그렇다면 인간의 지식은 과연 즉물적 반사가 단지 순차적으로 축적된것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그 방법론은 어디에서 생겼는가? 반영인가, 선험적인가?
5.일단 유물론의 전제를 받아들이면 하버마스의 말대로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지평(나름대로의 인식틀에 의한 인식의 범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최초의 반영+ 개인의 역사로 형성된다.
최초의 반영(인식)은 최초의 지식과 최초의 인식틀을 형성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상이한 경험에 따라(왜냐하면 사람은 자연을 완벽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수억의 70%짜리 반영이 생긴다. 부정확한 30%도 서로 다르다. 따라서 사람간의 상호관계 또한 계속되는 자연과의 상호관계를 통하여 인식의 지평은 계속 진화한다.
6.물적 존재(동물)로서 최초의 인간은 생존의 욕구를 가지고 이것이 최초의 자연과의 관계를 이룬다. 자연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사람은 사회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람간의 관계를 형성한다. 인식의 범위는 자연과의 계속되는 접촉과 함께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도 발전한다. 이는 테제 5번과 같다.
7. 그러나, 사회가 점점 발전하면서 사회는 또다른 자연이 된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면 할수록 인간과 자연의 직접적인 교류는 차단된다. 인간은 자연과 대표인 사회로 접촉하고, 개개인은 그 인간의 집합이자 보이지 않는 실체가 된 사회와 교류한다. 여기에서 가치의 문제가 생긴다. 인간의 계속해서 발전하는 인식틀은 자연과의 직대면이 아니라, 사회를 거친 메타가 된다. 그것은 왜곡되기 쉽고,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기도 쉽다.
8.이러한 상황에서 순수한 과학적 지식과 가치의 구별은 무의미한다. 현재 살아 숨쉬는 인간은 일차적으로 지식이 아니라 가치를 받아들인다. 지식이 가치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지식을 결정한다. 인식틀이 자신과 자연의 직대면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주어지기 때문.
9.그렇다면 이제 지식과 가치가 아닌 통합된 개념으로 인식 혹은 의식의 형성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 한다.
10. 사회로부터 일차적으로 전수된 인식틀에 의해 형성된 개인의 의식세계(혹은 지식체계, 기타등등)는 가치에 기반하기 때문에 그 진위를 순수 논리적으로 파악할수 없다. 그것은 사회라는 매개물을 제거한 상태에서 그 지식의 본 모습인 자연, 세계 그 자체와 대면할 때 확인될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사회를 거쳐서 세계를 본다. 완전 고립의 가상 상황이 아니고선... 따라서 진정한 지식은 단지 수렴될 뿐이다. 그것은 사회에 의한 왜곡을 최소화시킴으로써 보다 진실해질수 있다. 사회에 의한 왜곡을 최소화 시키는 것은 사회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 그 사회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함으로써 가능하며, 그것은 결국 실천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라는 것 조차 정태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자연의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 자연의 공포는 해소되었지만 사회가 보이지 않는 손이되어 새로운 자연의 공포가 된다. 더 나아가 사회에 의하여 지양된 자연의 공포는 그 부정의 부정으로 새로운 공포가 되어 다가온다.(이른바 환경재앙)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사회조차도 지양의 대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일은 스스로 공포의 대상을 느끼고, 또한 지양하고자 노력하는 속에서 새로이 새로이 알아지면 인식의 지평은 확대되며 자연에 더 다가선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을 일으킨 뛰어난 철학자지만, 불향하게도 사회 자체를 변증법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연과 동일시해 버렸다. 계급의식 또한 왜곡된 자연과의 관계였던 것이며, 계급의식을 넘어서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라본다 한들 역시 사회의 틀에 존재하는한 완벽한 인식은 아닌 것이다.
보다 잔인한 부정의 무시무시한 힘은 사회라는 인간생존방법의 하나조차 넘어서고자 한다. 그리고 그 넘어서고자 하는 노력이 행동이든 사유든간에 이루어질 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며, 여기에서 철학은 실천으로 전환된다. 사회를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는 사회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가상속의 제 3자가 아니다.
11.이에 사회과 교육은 새로운 모델을 요구한다. 그것은 지식획득+가치판단=의사결정이 아니라 반성+비판=실천의 모델이다.
반성은 2차,3차의 반영이기 때문에 왜곡되었을 수밖에 없는(자연의 반영사회의 반영더 작은 사회의 반영)인식의 틀을, 자신이 습득한 인식틀의 형성과정을 역사적으로 돌이켜 그 의미를 먼저 깨닫는 과정이다. 비판은 반성을 통하여 어느정도 정화된 선수지식을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자신의 1차적인 세계인 사회의 현상들과 상호작용하는 일이며, 그 모순과 왜곡을 찾아내어 그것을 지양하고자 하는 실천과의 매개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한 인식지평의 확대와 계속되는 지양의 과정이 바로 사회과 교육의 목표가 되며, 그 중극적인 목표는 결국 생존, 계속해서 제기되는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