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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Jun 10. 2021

교육운동의 출발점으로서 고통

요즘 우리나라 교육운동이 지리멸렬하다. 지리멸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맥이 끊어진 것 처럼 보인다. 언뜻언뜻 보이는 것들은 그 잔향 아니면 그림자들, 흔적들. 어디 교육운동 뿐일까? 거의 대부분의 사회운동이 비슷한 처지에 있는 것 같다. 그나마 교육운동은 처지가 좀 나은 편이다. 다만 지리멸렬할 뿐, 탐욕을 감춘 표리부동에 썩어나가지는 않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찾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다. 


운동이 뭔가 엉뚱한 길로 갈 때는 날선 비판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일 때는 비판 보다는 성찰이 필요하다. 비판과 성찰의 차이는 무엇일까? 비판은 자신을 맥락 밖에 내보낼 수 있는 객관적 시각에서 하는 것이다. 성찰은 자신을 포함시킨 전체적인 맥락을 함께 돌아 보아야 한다. 비판을 할 때 나는 그 문제의 책임 당사자가 아니다. 비판자는 그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에 대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하지만 성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 역시 그 문제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에게 혹은 어떤 집단에게 "이러 이러한 것은 틀렸다. 저러저러하게 바꾸어야 마땅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비판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라고 말 할 수는 없다. 성찰은 마치 강 건너 남의 동네에다 하듯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자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전교조, 실천교사, 등 단체와 조직의 차이를 불문하고 교육운동이 성찰을 필요로 한다고, 그래서 우선 나 스스로를 되돌아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육운동은 교육을 통해 세상을 좋게 바꾸겠다는 집단적인 움직임, 혹은 그런 교육을 만들겠다는 관철시키겠다는 집단적인 움직임이다. 운동을 성찰한다는 것은 그 집단적인 움직임에 자신이 가담한  출발점, 목적, 동기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당신은 왜 여기에 가담하였는가?"그 출발점이 아예 처음부터 틀렸다면 완전히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고, 출발점 자체는 옳았다면 왜곡된 지점이 어디인지 찾아,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출발점이 처음부터 잘못된 출발점일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념, 이론, 당위를 동기로 삼아 시작한 운동이다. 이념, 이론, 당위가 동기가 되어 시작한 운동은 쉽게 독선에 빠져든다.  그 이념, 이론, 당위를 통해 추상해낸 어떤 이상적이고 올바른 상태에 대한 프로토타입을 "선"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멀어질 수록 "악"으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운동의 목적은 바로 그 어떤 올바른 상태를 설정해 두고, 세상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그 세상은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로 취급되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은 추상된다. 가령 계급투쟁의 승리를 목적으로 삼는 활동가에게 개별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다. 추상적인 노동자, 계급의 대표자로서의 노동자, 노동자의 이데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럼 운동의 올바른 출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그 어떤 거창하고 황홀한 이념을 내세우더라도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고통에 대한 응답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위선, 독선, 혹은 과시에 불과하다. 심지어 고통에서 출발 하더라도 중간에 왜곡될 수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고통의 목소리에 응답하다 보면  목소리들 속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찾게 되며, 그것이 세상에 대한 이론이 되는 것이며, 방법들을 체계화 하면 주의, 이념이 된다.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고통에의 응답이 운동의 출발점이라 하더라도 운동이 모든 개별적인 고통에 대한 대증요법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 운동은 결국 활동가의 소진만을 가져온다. 잘 만들어진 이론, 이념은 무의미한 반복과 맹목적인 실천으로부터 활동가를 보호하며, 운동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경로를 찾도록 도와준다.


문제는 이 이론과 이념은 어느 정도 발전하다 보면 자기 증식, 자가 발전하기 쉽다는 것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인간의 순수이성은 단지 자신이 작동하는 방식에 불과한 범주들을 마치 세계의 존재 형식으로 착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무수히 많은 체계적인 허깨비들을 만들어낸다. 이 허깨비들은 그 자체내에서는 논리적 완결성을 가지기 때문에 마치 실체가 있는 것 처럼 착각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이론을 위한 이론, 이념을 위한 이념이 만들어지며, 결국 잘못된 출발점에서 비롯된 운동과 비슷한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 시점부터 운동이 생명을 잃어가며, 운동의 목적이 운동가 혹은 운동조직의 안녕과 보위, 그리고 구체적인 현실과 유리된 추상적인 정의의 실현으로 바뀌게 되며, 이 정의의 실현은 종종 폭력을 불사하거나 정당화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운동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설사 이론과 이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지런히 학습하더라도, 현실의 구체적인 고통에의 반응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고통에 대한 민감성. 이것은 학습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꾸준히 계속되는 의식적인 실천, 즉 수행을 통해 계발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정의의 실현을 앞세우게 될 때, 그리고 활동가가 고통에 대한 응답이라는 수행으로 자신을 계속 갱신하지 않고 추상적인 연역과 당위에만 의존할 때 운동은 계몽이 되고 꼰대질이 된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을 수정주의자,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아니 거의 조롱하는 정통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 계급의 고통을 줄여주고, 그들의 삶을 너 낫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어떤 추상적인 역사 경로나 강령 같은 것이 아니라고. 혁명과 개량 중 어느것이 노동자들의 삶을 실제로 개선해 주었는가? 그런 점에서 베른슈타인이야 말로 진정한 사회주의자였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고통만큼 공감할 수 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운동권은 대체 어떤 고통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체험했는가? 대체 어떤 참상과 고통,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한 반성에 기반했는가? 차라리 도산 선생 등 실력양성 운동 하신 분들의 반성은 분명했다. 나라가 못나서 백성이 못나서 이 지경이 되었다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디서부터 반성하고 어떤 고통에 뼈져리게 공감해야 하는가?


교육운동이라면 그 대상은 당연히 학생이다. 하지만 그 학생은 학생이라고 불리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구체적인 학생들이다. 그들의 고통은 80년대, 90년대의 그것과 당연히 다를 것이며, 그들의 고민도 당연히 다를 것이다. 물론 학생 뿐 아니라 교육자들의 고통에도 응답해야 한다. 말은 쉽지만 거의 10년 이상 방치되어왔던 일이다. 사실 나도 방치해왔다. 이제부터 수행을 좀 시작해야겠다. 수행평가만 시킬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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