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 조선의 종특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까지 우리나라는 물론 명나라에게도 가장 큰 골칫거리는 왜구였다. 고려말 최무선의 화약무기를 이용한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큰 기세는 꺾었지만, 한 세대가 지난 뒤 여말선초의 권력 교체기를 틈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골칫거리 왜구를 근절시킨 인물이 바로 이종무다.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이순신이 이전 조선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종무는 1419년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가 되어 군함 227척이라는 대규모 함대를 거느리고 왜구의 조선 침략 전진기지라고 할 수 있는 쓰시마를 공격하여 적선 129척을 빼앗고, 수 많은 포로를 구출하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웠다. 늘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던 조선이 처음으로 왜구를 먼저 쳐서 깨뜨린 것이다. 이종무는 이 공으로 장천군(長川君)에 봉해지는 등 영광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선비들이 다스리는 나라 조선의 종특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한 도덕정치를 표방하는 조선은 능력과 공적보다 인성을 우선시하는 나라였고, 이 운동권 성향의 선비들은 아무리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도 이런저런 인격적인 흠집을 잡아 공신에서 죄인으로 둔갑시키는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능력을 자랑하는 인물들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한 사례도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다. 누구든 큰 공을 세우면 조만간 큰 죄를 뒤집어 쓰게 된다는 것, 공이 클수록 뒤집어 쓸 죄도 커진다는 것은 조선의 국률이니까. 어쩌면 아직도 국룰일 수 있다.
선비들은 우선 이종무의 쓰시마 정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것 부터 시작한다. 하여간 책상물림답게 말 하나는 다들 잘한다. 이들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있었던 전투들 중 하나를 트집잡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는 이종무가 승리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박실이라는 장수가 전투에서 패하고 다수의 병력 손실을 입었는데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세종이 그런 말을 들어줄 인물이 아니다. 세종은 이렇게 대답한다.
"전대에는 왜적을 정벌하여도 한 모퉁이나 치다가 돌아오는 데 지나지 않았었는데, 이번 종무 등은 한인(漢人) 1백 40여 명을 잡고 왜적의 집 천여 호와, 왜적의 배 2백여 척을 불태우고, 왜적을 죽인 것이 백여 명이나 되니, 공이 적지 않은 것이어늘, 간원(諫院)들의 마음에는 공이 없다고 생각하는가."
한 마디로 이종무 이전에는 왜적의 본거지를 직접 공격한 사례가 없다. 오직 이종무가 처음으로 귀퉁이가 아니라 본진을 폭파하고 왔는데, 그게 공이 아니란 말이냐? 이런 돌직구다.
그러자 조선의 위대한 문관들이 역사에 길이남을 명드립을 남기며 세종에게 대든다.
"종무 등이 비록 공이 있다고 하지만, 모두가 다 신자된 직분에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인데, 무엇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종무가 상장군이 되어서 군에 명령을 실행시키지 못하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하였으니,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종무·습·초 등과 박실을 대질시켜 묻게 되면, 죄상이 귀착되는 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그 죄를 밝히고 처분하시어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시는 것이 신들의 바라는 바입니다."
요약하면 이거다. 장군이 전쟁에 나가 승리하는 것은 장군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니 공이 아니다. 그러나 장군이 조금이라도 병력을 잃으면 이건 죄다. 그러니 이종무는 공은 없고 죄만 있으니 상이 아니라 벌을 주어야 한다.
바로 이 정신이 이후, 아니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헬조선의 기본 마인드다. 가령 환자를 살리는건 의사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이니 칭찬할 바가 못되고, 환자가 죽기라도 하면 이건 죄를 물어야 한다. 이런 식의 마인드가 교사에게, 검사에게, 그 밖에 대부분의 전문직들에게 다 적용된다. 그래서 그들이 누리는 얼마간의 특혜에 대해서는 일반인 수준으로 깎아내리라고 외치면서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직업윤리를 들먹이며 일반인보다 높은 기준을 들이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대학교수에 대해서는 상당히 너그럽다. 대학교수가 조선시대 성리학 선비의 기능적 등가물이라 그럴까?
이종무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얼마나 황당하고 억울하겠나? 그래서 사석에서 그 억울함을 드러낸 모양이다. 그랬더니 이 말이 흘러나가 선비들로부터 사형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종무가 국문을 당할 때에 벌컥하면서 ‘늙은 놈이 죽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 옳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언사와 안색에 원망하는 빛을 나타내었으니, 다시 국문하기를 청합니다. 이종무의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는 형적이 이미 나타났으니, 사형에 처하기를 바랍니다."
큰 공을 세웠는데, 그게 별 거 아니라고 하고, 그 과정에서의 병력 손실을 이유로 징계를 운운하더니 이제는 죽이라고 까지 한다. 조선은 큰 공을 세우면 목숨이 위태로운 사회인 것이다. 물론 세종은 당연히 그 말에 반박했다.
"분하게 여기고 원망하는 말을 한 것은 어리석고 고지식한 때문이다. 어찌 딴 마음이 있으리오."
천하의 세종조차도 "아니 느그들 같으면 이 상황에서 욕 안나와?"라고 돌직구를 던지지 못했다. 다만 이종무의 성격이 욱해서 그런거니 이해해 달라 그러면서 선처를 구했다. 이후 세종은 이종무를 무장이 아니라 외교관으로 활용하면서 가능하면 나라밖을 돌게 하여 저 선비들의 예봉을 피하게 하였다.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잊혀질테니. 그리하여 조선초기 최고의 군공을 세운 무장은 유배와 사절파견을 반복하며 늙어서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훗날 이종무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남겨 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내면서 그를 흠잡았던 선비들을 간접적으로 디스했다.
"몸을 바쳐 힘을 쓰되 험난하거나 편안하거나 절개를 변함이 없었나니, 덕을 표창하고 공을 갚는 데는 은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타와야 할 것이라. 이는 고금을 통한 의리요, 국가의 떳떳한 법규이다. 오직 경은 깊고 억센 기질을 타고나서 너그럽고 무거운 도량이 있었다. .... 남방과 북방의 안무사(安撫使)가 되어, 백성은 힘입어서 편안하였고, 동쪽 서쪽의 절제사(節制使)가 되어, 도적이 감히 발호하지 못하였다. 항상 금병(禁兵)을 거느렸고 정부 계획에 참예하였었다. 삼군을 통솔하고 섬 오랑캐를 토벌하였으며, 사절(使節)을 받들고 두 번이나 중국에 들어갔었다. 이같이 여러 조에 충성을 바쳤으니 어찌 지혜를 내어 세 번 전쟁에 승첩한 것에만 그쳤으랴. 진실로 간성(干城)의 장수요, 사직(社稷)의 신하였다. 높은 반열에 올려서 위대한 훈공을 갚고자, 바야흐로 수하고 건강하여 같이 융성하고 태평한 세월을 누리고자 하였더니, 어찌하여 종창으로 갑자기 길이 갔는가. 오직 공이 높고 오랜 신하를 생각하니, 이 슬프고 아픈 심회를 어찌 이길 수 있으리오. 이에 예관을 명하여 나아가서 간략한 제전을 베풀게 하였노니, 슬프도다. 수명의 장단이 기한이 있을 것이나, 장성(長城)이 갑자기 무너졌음을 탄식하며 조상하고 도와줌을 특별히 더하여 씩씩한 넋의 어둡지 않음을 위로하노라."
그나마 공을 세운 신하가 모함으로 무너지지 않게 어떻게든 디펜스 해 준 군주는 세종을 마지막으로 영영 사라졌다. 임진왜란때 혁혁한 군공을 세운 장수들의 말로가 어땠든지가 이를 증명한다. 이순신은 한번 백의종군했고, 권율 역시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곽재우는 아예 잠수 탔고, 정문부는 역모에 몰려 목이 잘렸다.
그리고 2021년 현재. 대한민국을 이렇게 빠르게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집단 전체가 역적, 적폐로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