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만 그 아이가 좋았을 뿐이었다
나는 친구를 잘 사귀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워낙 성격이 내성적이기도 하고. 이거 못 믿겠다는 분들 있겠지만, 나의 활발하고 씩씩한 모습은 일종의 연기에 가깝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만나서 "내가~ 나는~"으로 시작되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어떤 현상이나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 내 이야기를 하는 상대는 아주아주 제한적이다. 그나마 사회생활 수십년 한 결과가 이거다. 갓 대학에 들어간 만 19세 소년이라면, 더구나 그 시기가 어두운 역사의 정점인 1987년이었다면 얼마나 적응하기 어려웠을까?
게다가 당시 국립대학교 사범대학은 등록금이 절반이었다. 국립대학 자체가 절반인데, 거기서 다시 절반인 것이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은 교사가 되려는 젊은이가 아니라 지방의 가난한 수재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어른의 슬하에서 벗어난 평생 일탈이라고 한해본 소년, 소녀들이 1987년에 대학에 들어왔다면, 부모는 멀고 선배는 가깝다면, 자연스럽게 운동권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나를 의식화하려는 선배들의 알량한 사회과학지식보다 내가 이미 섭렵한 것들이 훨씬 폭이 넓고 깊이도 있었으니까. 설사 아니라 하더라도 당위로 우겨붙이면 일부러라도 반대로 나간는게 나라는 놈이고, 또 닥지닥지 모여서 끈적하게 이야기하고 술마시고 하는 건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과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놀았다.
그렇다고 중고등학교 동문들과 어울리기도 쉽지 않았다. 나의 강남 친구들은 87년 6월과 따로 노는 분위기였다. 6월항쟁이 한창이던 1987년 6월, 강남친구들은 1학기 종강 파티로 하필이면 이한열이 쓰러진 연세대학교에 코트에서 같이 테니스 치고(요즘 같으면 골프장 라운딩 한 셈이다) 뒷풀이 하는 일정을 만들어 놓았다. 할 수 없이 가서 테니스는 쳤는데, 도저히 그날 그곳에서 맥주마시고 파티할 기분은 아니라 경기만 마치고 다른 약속 있다고 하고 먼저 나왔고, 이후 그 쪽 모임에도 발길을 끊었다.
그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단 한명 뿐이었다. 그 아이는 스스로 과외를 몇 개씩 뛰면서 학비, 방세, 심지어 부모님과 동생 용돈까지 챙겨주는 소녀가장이었다. 나하고 관심사가 비슷하다거나, 문화적 배경이 비슷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똑똑하고 자기 주장 분명하고 성격도 쿨한 아이였다. 과외가 필요할 것 같아, 돈 많은 친척도 소개시켜 주었는데, 그렇게 과외를 갔다오고 받은 봉투 안의 돈이 너무 많아서 "그 집이 이 정도로 돈을 써도 되는 집이야? 혹시 무리하는 거 아니야?"라며 걱정을 다 할 정도로 심성도 곧은 아이였다.
그 친척집이 당시 우리집과 같은 아파트 단지였기 때문에 그 집 과외가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만나 같이 가곤 했다. 그 아이는 똑똑하고 책임감도 강하고 성격도 좋아서 친척집에서는 무척 좋아했다. 사촌들도 친언니처럼 잘 따랐다. 결국 그 집 딸 셋 과외를 다 맡아서 하게 되었고, 거의 웬만한 직장인 월급만큼 과외비를 벌었다(그 집은 그래도 되는 집이다). 계산이 분명한 아이라 과외비 받는 날이면 소개해 준 사례라면서 "강남패션 1번지"에서 나한테 한 턱씩 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호암 아트홀에서 열린 안톤 쿠에르티 독주회에도 같이 갔다. 당시는 지금처럼 세계적인 연주자의 내한공연이 흔하지 않았다. 슈베르트 방랑자 환상곡이 메인 프로그램이었던 공연으로 기억한다. 클래식 음악회라는 것을 처음 와보는 그 아이는 너무 그 자리를 진지하게 생각해서 연 자주색 투피스와 구두 차림으로 나타나 대충 입고 간 나를 민망하게 했다.
어떤 날에는 오전에 영화 하나 보고, 점심 먹고 오후에 영화 또 하나 보고 이러면서 진탕 놀기도 했다. 오전 영화는 호암아트홀에서 '지젤' 오후영화는 지금은 사라진 서대문 푸른극장에서 '하워드 덕' 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좋은 감정은 분명 있었는데, 연애 감정은 아니었다. 손잡고 싶다거나, 터치를 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 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냥 편하고 좋았고, 조금은 존경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매력이 없는 아이는 결코 아니다. 객관적으로는 오히려 미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 아이와는 2학년때까지 계속 친하게 지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운동권으로 기울었고, 결국 그 아이와 같은 세미나 T에 속하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 그 T를 이끌던 선배가 어느날 그 아이를 보며 "야, OO도 이제 운동권 티가 팍팍 난다." 이러면서 대견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그 아이의 미묘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사실 나는 그 아이가 운동권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이 사회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부채의식에서 그 길에 접어들었지만, 그 아이는 그런 부채의식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온 가족의 기대와 투자가 올인된 자신을 그렇게 역사의 강물에 집어던질만큼 무책임하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현실적이고, 달리 표현하면 영악하다고 할까? 물론 선배의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갈 정도로 단순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단순한 녀석이면 내가 상대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날 이후 그 아이는 그 써클에 발을 끊었고, 나는 그 선배가 "너는 이제 내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하며 PD 중앙에 넘길 지경으로 그 세계에 깊이 들어갔다. 당연히 그 아이와의 거리는 멀어졌고. 그러다 PD에서 연애도 하고, 결혼 상대도 만나게 되었으니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고. (아니 PD가 그런 곳이었어?)
그러다 우연히 그 아이 이름을 인터넷에서 보게 되었다. 예상대로 훌륭한 커리어를 쌓으며 나름 이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옛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그 뿐. 그 시절의 추억은 그 시절의 추억으로 그냥 남겨 두는 것이다. 굳이 소환해서 그리워하고, 의미 붙이고, 그러는건 인생 제대로 못 한 아재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 아이는 그 아이대로 잘 살고 있고, 나는 나 대로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으니, 19살 당시, 그 어린 아이들이 그래도 사람은 제대로 봤구나 하고 자신의 감식안을 자랑스러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어쨌든 그 아이와 같이 있었던 시간들은 다 좋았으니까.
그런데 이게 대체 무슨 스토리지? 일단 첫사랑 스토리는 절대 아니고. 이게 뭐냐 싶다. 하지만 나는 감정에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쨌든 이게 나의 건축학개론이다. 물론 흥행에는 대실패 하겠지.
자 이것은 실화일까요, 앞으로 쓸 소설 줄거리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