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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Oct 12. 2021

작가실격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는 차라리 "사양"을 더 흥미있게 읽었고, "인간실격"을 읽고난 느낌은 솔직히 "그래서 어쩌라고?"였다. 하지만 저 제목만은 참 좋다. 그래서 슬쩍 제목을 빌려와 본다. 물론 나는 다자이 오사무처럼 비관적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실격"이라는 말은 너무 과하다. 만약 내가 인간실격이라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존재실격이라 불러 마땅하다. 그래서 나는 인간 전체로서 실격이라고는 차마 말 못하겠고, 다만 그 중 한 부분으로서 작가 실격을 말한다.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는 여기 저기서 작가라고 불리는 처지다. 물론 우리나라가 작가라는 호칭을 아주 싸구려로 사용하는 풍토의 나라이긴 하다. 아무 글이나 엮으면 책이되고 아무 책이나 내면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책 한 두권 끄적 끄적 냈다고 작가라고 부르는 건 너무 과장이다. 끄적 끄적 책 한 두권 엮어 내는 건 작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다. 편집자만 잘 만나면 말이다. '작가'라는 말을 직업, 소위 말하는 주캐가 아니라 부캐로라도 사용하려면 그냥 책을 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책이  "의미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작가는 이야기꾼이다. 그 이야기가 허구인지 실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논픽션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이야기로 만드는 과정은 픽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이야기로 만들어지고 나면 허구와 실제의 경계는 모호하다. 사실 픽션은 완전한 허구가 아니며 논픽션도 완전한 실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이야기다. 모든 이야기는 허구와 실제가 혼재되어 있으며 독자 혹은 청자의 마음을 흔들수 있게 효과적으로 배치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라는 호칭을 스스로에게 함부로 붙이지 못한다. 아무리 수십권의 책을 써내었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책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었지만 번번히 설명꾼으로 전락하곤 했다. 


작가가 되는 것은 나의 오랜 꿈, 지금도 간절히 바라는 꿈이다. 그 꿈의 역사는 꽤 길어서 중학교 1학년 때 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5학년때 까지만 해도 나의 꿈은 확고하게 화학자(과학자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화학자였다)였지만, 6학년때 '죄와 벌' 과 '파우스트'를 읽고 꿈을 바꾸었다. 특히 파우스트를 너무 사랑해서 그 세로줄로 된 두꺼운 책을 거의 필사하다시피 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장래희망란에 아주 구체적으로 '소설가'라고 적었다. 당시 교사라는 직업은 나의 장래 희망 목록에서 열 손가락은 커녕 발가락까지 동원해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마 온 가족의 손가락, 발가락을 다 동원해도 그 순위안에 없었을 것이다. 


중학교때 내가 세웠던 장래 계획은 이랬다. 일단 서울대학교에서 영문과, 불문과, 독문과 중 하나를 선택해서 진학한다. 왜 굳이 서울대학교냐 하면, 우리 집안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말은 생략한다. 대학을 졸업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 유학가서 더 많이 공부하고, 그 깊어진 내공으로 길이남을 명작을 쓴다. 그 다음은 노벨 문학상 등등. 법, 정, 경 쪽은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다. 물론 당시 내 점수로는 갈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내 점수는 나의 한계가 아니라 그 정도만 받기로 한 점수에 가까웠다. 어차피 법, 정, 경 안 갈거라면 시험공부는 대충 그 정도로 해 두고 작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미 나의 작가실격 사유가 발생한다. 작가가 되겠다면서 그 자양분을 독서에서 얻으려 한 것, 작가가 되겠다면서 서울대 진학을 요구하는 어른들에 맞서 중대 문창과 같은 곳에 용감하게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대 어문계열 쪽으로 비겁한 타협을 봤다는 점. 그런데 특이하게도 작가가 되겠다면서, 그 꿈과 어른들의 요구 사이의 타협이라면서 어문계열을 선택하면서 정작 국문과 진학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80년대를 관통하던 문화사대주의의 영향일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번역서로 보던 영, 프, 독 문학에 비해 한국 문학이 칙칙하고 구리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또 일본 문학은 박정희, 전두환 시절 관제교육의 영향으로 무조건 싫었다. 어차피 서울대에 일문과가 없기도 했고. 자신들의 반일정신을 진보적 정신이라고 착각하는 40-50대들이 제법 있는데, 안타깝지만, 그건 진보가 아니라 독재시절 세뇌교육의 영향이다. “독도는 우리땅” 노래가 언제 나왔는지 생각해 보라. 만약 박정희 전두환이 친일파였으면 그 가수가 어디 살아남을 수나 있었겠나?


그래서 결국 서울대학교 독어교육과로 진학했다. 그렇게 김누리의 후배가 되었.... 영문과, 영어교육과 쪽은 점수가 모자랐다. 독문과가 아닌 독어교육과를 선택한 것은 "만약의 경우, 하다 못해 선생이라도"라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반영한 것이긴 하지만, "하다 못해" 선생이 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긴 어차피 독어교사의 수요가 0에 수렴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그럴 생각이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였고, 그 교사자격증은 없는 것 보다는 나은, 혹은 거기에 복수전공, 부전공을 보탤 수 있는 일종의 바탕화면에 불과했다. 물론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나았다. 

불어가 아닌 독어를 선택한 것은 1980년대 우리나라 먹물 사회의 '독일 선망'의 영향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척 하고 있지만, 의외로 상남자였던 나는 남자는 독어, 여자는 불어 이렇게 나뉘던 당시 2외국어 풍토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당시 책 좀 읽었다는 청소년들의 독서 목록이 늘 독일 작가 이름으로 가득했던 시절이다. 당장 나도 파우스트를 읽고 작가를 꿈꾸지 않았나? 그 밖에 프리드리히 쉴러,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잉에보르크 바흐만 등 독일 문학은 뭔가 심오하고 있어보였다.


이게 스무살이 될 때 까지의 내 삶이며, 내가 작가 실격인 증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작가는 위대하고 심오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위대하고 심오한 사상을 만들고, 그 다음에 그 사상을 구체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위대한 작가들이 심오한 사상 이전에 우선 자기 이야기, 자기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람의 삶 치고 심오한 사상이 담겨있지 않은 삶은 거의 없으니, 자기 삶의 이야기를 성실하게 풀어나가면 심오한 사상은 저절로 드러난다는 것을.  위대한 작품은 결국 자기 삶의 한 편린에서 동기를 찾아내어 그것을 발전시킨 것이라는 것을. 따라서 저 위대한 작가들 중 청소년기, 청년기때 복잡하고 위태로운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그 복잡하고 위태로운 청소년기, 청년기야 말로 위대한 작가의 자양분이라는 것을.


망할, 그런데 반백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나의 어린시절, 청소년 시절을 너무 평탄하게 보내고 말았다는 것을. 그 증거처럼 반백이 훌쩍 넘은 지금도 내 머리는 백발은 커녕 희끗거리지도 않는다. 이 시커멓고 숱이 많은 머리털이 그냥 아무 어려움 없이 살아온 나의 삶을 검게 채색하고 있다. 청춘을 사로잡을 짜릿한 경험도 없었고, 어린 가슴에 멍이 들었다 아물었다 할만한 삶의 굴곡도 없었다.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부잣집에 태어나 입이 쩍벌어질 환상적인 경험을 한 것도 아니다. 그저 적당히 잘사는 집에서 태어나 어려움 없이 자라고, 적당히 공부 잘해서, 적당히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결국 지금처럼 적당히 좋은 직장에서 적당한 재산을 모으며 적당히 살아왔다. 이 수많은 적당함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그러니 작가로서는 실격이라고 할 수 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책을 쓴다. 심지어 청소년 교양서 등이 아니라 소설책도 두권을 냈다. 그리고 솔직히 아주 잘 썼다. 현역 한국 작가 중에 이 정도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는 이게 재능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나의 재능을 믿었지만, 지금은 그 재능이 나이와 함께 세월따라 다 흘러가 버렸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젊은 시절에는 실격이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패자부활전 기회가 주어졌고 그 시험을 통과했다는 뜻이다. 패자부활전이 대체 언제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패자부활전으로서 적당히 좋은 직장이라 생각했던 교직, 그리고 1987-1991년 사이에 경험했던 학생운동 말고는 생각 못하겠다. 결국 저 둘이 내 인생에 얼마 안되는 굴곡을 제공했고, 나는 저기서 세상에 던질 이야기를 길어내야 하는 것이다. 심오한 사상은 길어내다 보면 나올 수도 있고, 나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읽는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낼수도 있는 것이다.


만세. 실격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지런히 써야겠다. 아니, 뭔 결론이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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