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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Apr 05. 2024

거란이 고려와 싸운 까닭은?

고려거란전쟁 이야기 (1)


요즘 핫한 드라마 고려-거란 전쟁 나온 김에 국민 사회교사로서 계기 수업을 좀 해야겠다. 일단 드라마 자체는 이제 우리도 NHK대하드라마 수준의 서사극을 만들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수작의 필이 난다. 다만 배우들의 대사가 딕션이 문제인지 후반작업이 문제인지 하여간 좀 그렇다. 드라마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역사 이야기를 하자.



고려-거란 전쟁 그러면 마치 몇년에 걸쳐 큰 전투 서너번 한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임진왜란도 7년전쟁이니 얼마나 되겠냐 하겠지만 실제로는 991년부터 시작하여 1019년까지 무려 30년에 걸쳐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이 계속된 사실상 한 세대에 걸친 전쟁이다. 그 사이에 고려 왕도 성종, 목종, 현종으로 세번이나 바뀌었다. 이 책을 가지고 계신 분은 그냥 읽으시면 된다.


              거란은 어떤 민족인가?            

우선 30년이나 집요하게 고려를 공격한 거란이 어떤 민족인지 알아보자. 

사실 북방 민족은 딱 부러지게 무슨족, 무슨족 이렇게 구별하는게 쉽지 않다. 이들은 민족이 아니라 부족 단위로 생활했기 때문에 사실상 같은 민족으로 보이는데도 원수처럼 싸우고, 또 몇몇 부족이 갈라져 나가나 싶다가 새 민족이 되기도 하고, 혹은 여러 민족이 섞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거란족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은 민족이라 더욱 그 정체를 알기 어렵다. 다만 현재 몽골족과 위구르족이 거란족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굳이 따지자면 남몽골 지역에 살던 반농반유목 민족으로 스스로를 #키탄 이라 부르던 민족이라고 정리해 두자. 그리고 몽골, 위구르족과 공통의 조상을 가진 민족일 가능성이 크다. 거란, 몽골, 위구르의 공통 조상이 중국의 북조를 지배했던 선비족이라는 학설이 대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거란족은 몽골족처럼 아주 유목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지을만한 땅이 있으면 정착해서 농경생활도 하는 민족이다. 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다른 유목민족처럼 약탈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빼앗고 정복한다는 뜻, 그리고 기병의 빠른 속도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민족의 특징인 조직적인 팀플레이도 한다는 뜻이다(이는 역시 반농반유목 민족인 여진족도 가진 특징이다). 



당시 거란의 위상은?

중국을 통일한 송나라는 문치주의로 인해 군사력이 매우 약했다. 정규군은 오직 황제의 눈 앞에 보이는 수도에만 두고 각 지역에는 예비군을 편성하고 있다가 중앙에서 파견되는 장군이 이를 지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었다. 지방세력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지만, 빠르게 치고들어오는 기마민족에게 당할수 밖에 없는 체제다.이 무렵 여러 부족으로 나뉘었던 거란은 야율야보기의 지도아래 통일을 이루고 국호를 대요라 하였다. 나라 이름 앞에 대를 붙이는 것은 자기들이 대국이란 뜻이다. 대국은 오늘날의 제국에 해당되는 말이다.  참고로 신라도 통일 이후 대신라라 칭했고, 고려 역시 대고려라 칭했다. 그리고 '대송'은 너도 나도 대국을 자처하는 상황에서 천자의 진노를 발휘하여 정벌할 힘이 없었다.


거란은 빠르게 힘을 키우고 발해를 멸망시켜 단숨의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송이 5대10국을 통일하던 혼란기를 틈타 연운16주(오늘날 베이징 일대)를 획득했다. 이는 기마민족이 만리장성 안쪽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다는 뜻이며, 중국 입장에서는 무방비 상태로 강력한 기병의 공격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통일 이후 986년에 대군을 일으켜 거란을 몰아내려 했는데, 오히려 처참하게 패하고 해마다 세폐(상납이라 봐도 무방)를 바치면서 평화를 구입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송은 고려에게 함께 거란을 치자고 요구했는데, 고려는 그 유명한 #중립외교 를 펼치며 모른척 했다.


즉 거란은 단지 북방의 오랑캐가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제압하고 사실상 조공을 받는최강대국이다.문화적으로도 결코 오랑캐가 아니다. 고려가 초조대장경을 만든 배경에 거란도 대장경이 있는데 우리가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경쟁심이 있다. 즉 문화적으로도 고려에 뒤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런 거란이 왜 고려를?

당시 송은 여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고, 고려를 거란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 하였으므로 거란이 이를 견제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고려는 송의 요청을 거절했지만 거란은 고려가 송과 동맹맺을 가능성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이름빨

고려라는 이름은 곧 고구려다. 사실 고구려와 고려는 같은 이름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는 중국 문헌에서 고려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고구려는 거란의 조상뻘인 선비족의 라이벌이었으며 선비족이 중국의 북조를 지배하던 시절에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상대였다. 거란 입장에서는 그 고구려의 존재를 껄끄럽게 생각할수 밖에 없다. 


비슷한 이유로 한참 뒷 시대의 몽골도 고려와 고구려를 구별하지 않고 껄끄럽게 여겼다. 


거란은 송나라는 우습게 봤지만 고려는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자 마자 바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요청했지만 왕건은 완강하게 이를 거부했고 심지어 유언으로 거란과 화친하지 말라고까지 했다. 사실 이건 태조 왕건의 치명적인 외교 에러다. 거란이 멸망시킨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이면서 평양 일대로 영토를 확장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설사 왕건이 거란과 적대하지 않는다 해도 그 발해에서 망명온 대씨 일족들이 고려 말고 어디로 가겠는가?


어쨌든 계속되는 유화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으니  거란은 잠재적인 적국이자 위협인 고려를 제거해야 했다.



2)지정학적인 위치

고려에게 거절당한 송은 여진과 손을 잡았다. 여진은 예로부터 전투종족으로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거란은 반드시 고려를 자기편으로 삼아야 했다. 만약 고려가 여진을 견제할 수 있다면 여진이 송과 손을 잡고 거란의 뒤를 친다는 따위의 짓거리를 할 수 없다. 송-여진 vs 거란-고려 이렇게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가 완강하게 동맹을 거부하고 송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송-고려-여진 vs 거란 이렇게 되면 생존을 보장하기 어렵다. 따라서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던가 아니면 완전히 제압하는 것은 거란에게는 거의 절체절명의 과업이다.


문제는 고려가 이런 국제정세를 이해하고 미리 대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당시 고려 성종은 숙청과 내분으로 피칠갑을 한 광종때의 상처를 보듬느라 밖에 신경 쓰기가 어려웠다. 이틈을 타 거란은 991년 선제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오늘날 의주 일대(당시 이름은 보주)를 확보해 버렸다. 당시 평안북도 북부지방은 누구의 땅도 아닌 애매한 위치였는데, 여기를 거란이 차지함으로써 송과 여진은 직접 교류할 길이 막히게 되었다.


이제 거란은 마지막 단추만 꿰면 되었다. 고려와 적대적인 관계만 해소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 화친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냈다. 사실 이때 적절히 대처했으면 전쟁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성종은 거란의 화친 요구에 대해 가타부타 대답 없이 그냥 말끔하게 씹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자 거란은 무력 행사를 통해 고려를 굴복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리하여 993년 소손녕이 80만 대군이라고 뻥을 치며 고려를 향해침공을 개시했다. 이것이 바로 1차 침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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