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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골라 낸 음반들을 거실 바닥에 연대 순으로 늘어 놓았다.
음반 표지 위에 찍힌 저마다 다른 표정과 다른 포즈를 하고 있는 정우의 사진들이 나이 순으로 늘어섰다. 마치 예술가로서의 삶의 목차를 보는 것 같았다.
목차라고? 어, 목차가 되었다면 작업이 절반은 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 글만 쓰면 되는 거다. 나는 얼른 음반 목록을 마치 목차처럼 공책에 적어 넣었다.
1.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봄’/8번/9번’크로이처’. 바이올린: 미우 권, 피아노: 디누 권. 도이체 그라모폰, 1981
2.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V. 454 & KV.526 바이올린: 미우 권, 피아노: 디누 권. 도이체 그라모폰, 1981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이 두 장이 디누가 낸 첫번째 음반이다. 13세 때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녹음이라니 꽤나 빠른 출세인 셈이다. 그런데 이 음반들의 주인공은 디누가 아니라 누나인 미우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당시 미우 나이 역시 16세에 불과했다. 미우에 대해서는 앞으로 할 말이 많으니 이 정도로 해 두자.
3. 초절 기교 바이올린 곡집: 파가니니, 사라사테, 비에냐프스키 등. 바이올린: 아녜스, 피아노: 디누 권. RCA, 1983
이건 정우가 아녜스와 함께 녹음한 음반이다. 당시 정우는 열 다섯, 아녜스는 열 일곱 살이었다.
아녜스는 한국계 미국인인 아버지와 홍콩과 이탈리아 피가 섞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가부장적인 논리를 동원하여 억지로 끼워 맞추자면 한국계라고 할 수 있는 미국 바이올리니스트다. 11세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며 활발한 연주활동을 한 신동이옸지만 음악보다는 미모로 더 유명했다. 바이올린 요정 따위의 별칭으로 불렸고, 웬만한 팝스타 못지 않은 인기를 누렸다. 정우가 본인이 별로 원하지도 않은 클래식 아이돌 취급을 받은 것도 아녜스와 함께 연주하면서 도매금으로 넘어간 면이 컸다.
아녜스는1982년 가을부터 정우와 함께 연주활동을 했다. 둘은 연주만 함께 했던 것이 아니라 애정 행각도 활발히 했다. 정우의 첫사랑이자 풋사랑.
하지만 둘의 사랑은 1984년 1월 재앙에 가까운 공연 실패와 함께 종지부를 찍었다. 아녜스는 음악활동을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결국은 유체역학을 전공한 공학박사로 변신하였다. 사실은 원래부터 과학고등학교 학생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에도 애매하게 계속 이어졌다. 아녜스는 정우가 건립한 프로 무지카 콘서트 홀 내부 설계 등의 일을 도맡아서 하고, 인체공학적인 의자를 설계하여 정우의 연주와 작곡활동시 편하게 앉게 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4. 파가니니 2중주 곡집 (편곡: 디누) 바이올린: 지네트, 피아노: 디누. EMI, 1985
여기서 또 다른 여성, 그리고 디누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이 등장한다. 누나 미우, 첫사랑 아녜스, 그리고 마침내 지네트다. 지네트는 한국계 프랑스 바이올리니스트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달리 쓸 표현이 없으니 그냥 쓰기로 하겠다. 바로 디누의 뮤즈다.
한국 이름으로는 강소정이지만 그 이름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애초에 파리에서 태어났고 생애 대부분을 파리에서 살았고, 프랑스 한국 모두 2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20세가 되는 1988년에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완전한 프랑스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네트 강이라고도 하지 않고 그냥 지네트라고 부른다. 정우도 지네트와 함께 연주하면서 여기 맞춰 디누 권이라 하지 않고 그냥 디누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Dinu Kwon을 DINU 이렇게 대문자로)
지네트는 출생이 조금 복잡하다. 지네트의 어머니는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도로 파리에 유학중이었는데, D산업 파리 지사에서 근무하던 D그룹 후계자 강OO과 사이에서 지네트를 낳았다. 이렇게 지네트는 프랑스와 한국에 모두 출생신고가 된 이중 국적자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는 지네트 강, 한국에서는 강소정.
하지만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이들은 혼인에 이르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가D그룹 부회장이 된 강OO은 지네트 모녀를 위해 파리에 좋은 집을 장만해 주고 생활비를 대 주는 등 나름의 책임을 다했다. 그리고 지네트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마침내D그룹 회장이 되어 정식 혼인을 하고자 하였으나, 그만 지네트의 어머니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여섯 살 난 지네트는 아버지 강회장을 따라 한국에 와서 강소정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열 세 살 때 파리 콘서바토리에 다니기 위해 다시 파리로 건너가 이후 계속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정우는 지네트를 존경했지만 때로 그 재능을 질투하기도 했다. 둘 사이가 연인이라는 설이 파다 했고, 정우가 최유선과 결혼한 이후에도 그 연기는 여전히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 올랐지만 지네트는 이를 여러차례 부인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최유선이 지네트와 절친한 사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둘은 정우가 지네트와 알고지내기 훨씬 전부터 친구였다. 최유선은 정우와 결혼한 이후에도 지네트와 정우 사이에 대해 온갖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고,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이 음반은 정우가 피아니스트 뿐 아니라 작곡가로서의 기량을 선보인 첫 음반이다. 파가니니의 2중주는 원래 바이올린과 기타로 편성되어 있지만, 정우가 그 중 기타 파트를 피아노 파트로 편곡했다.
편곡이라기 보다는 완전히 피아노 파트를 완전히 새로 작곡해 입혔다고 하는 쪽이 가깝다. 파가니니 원곡에서 기타 파트는 수동적인 반주에 그쳤지만 정우가 편곡한 피아노 파트는 매우 능동적인 협주자로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2중주 소나타만큼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우는 당시 이 편곡에 대해 “리스트가 파가니니와 함께 공연한다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책상 위에 적어놓고 작업했다고 밝혔다.
5. 모차르트 피아노 독주곡 전집 전집(8CD) EMI, 1987
6.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집(4CD) 20, 21, 22, 23, 24, 25, 26, 27번. 지휘: 디누, 피아노: 디누, 암스테르담 18세기 관현악단, EMI, 1988
7. 슈만 피아노 협주곡&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디누, 지휘: 볼프강 지히발, 취리히 톤할레 교향악단. 필립스, 1988
8.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No 9 ‘크로이쳐’,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No 3,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V.379, KV. 454, KV.526/(2CD), 피아노:디누, 바이올린: 지네트, EMI, 1989
9. 모차르트 두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곡 전집 (2CD), 피아노1: 최유선, 피아노 2: 디누, EMI, 1989
10. 쇼팽 24전주곡, 4발라드, 4즉흥곡, 24연습곡, 피아노소나타 2번, 3번(3CD) EMI, 1989
11. 슈만 환상곡 op.17, 다비드 동맹 무곡 op.6 EMI, 1989
12. 디누의 피아노 교실 (체르니 30번/40번/50번 시범연주와 해설) 예일음반, 1992
이제야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로서 디누의 황금기를 빛내는 음반들이 나온다.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와 2중주가 아니라 그야말로 독주 피아니스트로서 전성기를 누렸던 시절의 음반들이다.
그런데 정우가 피아니스트로서 누린 전성기는 3년-4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나는 천재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가 천재 아님에 감사한다.
곡목을 보면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이미지, ‘건반 위의 체 게바라’라는 별칭과 달리 음악세계가 지극히 보수적이며 편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토벤, 바흐, 브람스는 10대, 20대 까지는 거의 건드리지 않다가 30대 들어서 조금씩 연주하기 시작했다. 드뷔시, 라벨, 포레, 생상 등은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다. 현대음악은 악보로는 열심히 공부했고, 집이나 학교에서는 자주 연주했고, 또 훌륭하게 연주했지만, 막상 공연 프로그램에는 올리지 않았고, 음반 녹음도 하지 않았다. 리스트나 라흐마니노프는 듣는 것은 좋아했지만 연주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나는 이 책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결국 정우의 레파토리는 모차르트, 슈만, 쇼팽 정도로 매우 좁았다.
13. 디누 플레이스 바로크 바흐, 헨델, 스카를라티: 바흐 파르티타1번, 헨델 모음곡1번, 5번, 스카를라티 여섯 개의 소나타, EMI, 1997
14. 성찰하는 모차르트(모음곡, 판타지와 푸가, 론도, 지그, 안단테, 소나타의 느린악장들) EMI, 1999
15. 명상과 영혼의 피아노: 브람스 세 개의간주곡 op. 117/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 1악장, 28번 1악장, 30번 3악장, 31번 1악장, EMI, 2001
연도를 보면 이상한 점이 바로 느껴질 것이다. 전성기 때 음반과 거의 7년간의 공백이 있다. 실제로 정우는 1990년 부터 7년간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다. 20대를 고스란히 다 날려먹은 셈이다. 그 사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일단 내가 아는 대로만 설명하면 이렇다.
정우는 피아니스트로서 그 명성이 정점에 이르렀던1989년 12월 드레스덴에서 앵콜로 쇼팽 2번 소나타를 연주하는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한 동안 코마상태로 있다 한국으로 이송되었는데, 이후 2년간 아예 완전히 잠수를 탔다. 나는 그 때 정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무렵 노동자 학생 동맹인가 뭔가 하는 조직 사건으로 성진은 체포되고 나는 수배 당해 도망다니는 등 사정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둔하며 요양하던 정우는 1992년에야 다시 대중 앞에 얼굴을 드러냈고 음악 활동을 시작했지만 피아노 만큼은 연주하지 않았다. 음악 교육자(나중에 음악 영재 교육으로 교육학 박사까지 받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에 이어 대학원까지 동창이 되었다), 지휘자, 작곡가, 심지어 현악 4중주단 제2바이올린 연주자, 관악 앙상블의 클라리넷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한 마디로 “피아노만 빼고” 다 했던 것이다.
이 세 장의 음반은 그렇게 오랫동안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던 정우가 다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낸 것들이다. 하지만 돌아온 디누에게서는 20대 초반 정성기 때의 영혼을 뒤흔드는 그 건반의 체게바라 디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레파토리 자체가 확 바뀌었다. 차분하게 가라앉고 명상적인 음악 세계를 추구했다고 할까? 피아노의 강렬한 울림보다는 미세한 울림에 집중했다고 할까? 좋게 말하면 무르익었다 할 수 있었고, 나쁘게 말하면 조로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서른 밖에 안된 피아니스트가 무슨 인생 말년의 에밀 길레스나 루돌프 제르킨 같은 연주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시기의 정우 연주를 “힐링이 된다.” 라며 오히려더 좋아했고, 티켓 파워도 훨씬 막강해졌다. 어쩌면 세기말적 우울한 감성과 맞아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힐링 디누 스타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음반들은 사두기만 하고 잘 듣지 않았다.
16. 모차르트 교향곡 31 ‘파리’, 35 ‘하프너’, 36 ‘린쯔’, 38 ‘프라하’, 39, 40, 41’주피터’(3CD) 지휘: 디누, 연주: 프로 무지카 서울. EMI, 1998
17.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슈만 교향곡4번, 지휘: 디누, 연주: 취리히 톤할레 교향악단. EMI, 1999
18. 슈만 피아노 협주곡,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최수민, 지휘: 디누, 연주: 런던 BBC심포니 오케스트라. EMI. 1999.
이건 정우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지휘자로서 남긴 음반들이다. 정우가 지휘한 음반은 이것 말고도 훨씬 많다. 2000년- 2003년 사이에는 거의 남발한다고 할 정도로 찍어내었다. 하지만 피아노는 몰라도 지휘자로서 정우는 내 취향이 좀 아니라 그냥 이 정도만 펼쳐보고 말았다.
하지만 오해하면 안된다. 지휘자로서 정우가 그렇게 형편없다거나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지휘자로서 정우의 역량은 피아니스트만큼 독보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세계 탑 클래스라 부를 정도는 되었다. 20대 후반에, 그것도 전공이 아닌데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다만 정우에게는 세계적인 유명 교향악단은 물론 국내 주요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경력도 없다. 요즘과 달리 그때 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는 독주자라면 몰라도 지휘자만큼은 젊은이에게 문을 그리 쉽게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혹은 그때 까지만 해도 유명 교향악단들이 상당히 배가 불러서 오늘날 같은 빙하기가 올 것이라고 상상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우는 구태여 내주지 않는 자리에 연연하기 보다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설립해서 -실은 최유선이 세운 것이나 다름없지만- 스스로 지휘자 경력을 만들었다. ‘프로 무지카 서울‘이라는 묘한 이름의 오케스트라가 그것이다.
이 오케스트라의 전신은 지네트가 1984년에 일종의 프로젝트 팀처럼 만들었던 ‘서울 영 프로 무지카’다. 이때도 정우가 지휘자를 맡았다. 하지만 이 작은 관현악단은 지네트가 한국에 머무르던 몇 달만 활동하다 흩어졌다.
그런데 정우가 피아노를 두려워하며 다른 길을 찾던 무렵 최유선이 옛 멤버들에게 연락하여 다시 모이게 만들었다. 다시 모인 이들은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영’을 지우고 프로 무지카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1993년에 정식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디누가 예술감독 겸 상임 지휘자에 취임했다.
처음에는 6-5-4-3-2의 현악 5부 편성과 목관과 호른은 각 2관 편성, 여기에 트럼펫, 트럼본, 팀파니 하나 씩으로 구성된 30명 내외의 작은 체임버 오케스트라로 출발하여 모차르트, 하이든과 바로크 음악을 주로 연주했다. 하지만 1996년부터는 점점 규모를 키워 1997년에는 규모가 50명이 넘어 베토벤과 19세기 낭만파 까지 레파토리에 넣고 연주하는 중견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1996년부터 실시된 지방자치제가 이 오케스트라에게 축복이 되었다. 구청장을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면서 각종 선심성 정책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선심성 정책의 일환으로 정우가 거주하던 서울 송파구는 송파 아트홀 상주단체로 이 신설 오케스트라를 초빙했던 것이다.
덕분에 정우는 1996년부터 연습실과 공연장 걱정을 덜었다. 1997년에는 송파 아트홀의 음악당을 ‘프로 무지카 홀’로 이름 짓고 클래식 공연에 적합하도록 리뉴얼 했는데, 아녜스가 내부 방향판을 설계한 이 음악당은 음향 좋기로 국내에서 첫 손 꼽히는 곳이 되어, 공연장뿐 아니라 녹음 스튜디오로도 많이 활용되었다.
이후 정우는 이 일취월장한 악단과 함께 해외 투어도 다니면서 국제적인 지휘자로 이름을 알렸다. 이 악단의 연주 수준은 둘째 치고, 일단 디누라는 이름 값 때문에 티켓 파워만큼은 확실했다.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 낸 경력을 바탕으로 정우는 런던 BBC 심포니, 취리히 톤할레 심포니, LA 퍼시픽 심포니 등 여러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위촉되었다. 하지만 정우는 비유하자면 피아니스트로서는 역대급이었지만 지휘자로서는 당대의 S클래스 정도였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랬다.
어쨌든 지휘자로서의 디누의 인기도 상당했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만약 여느 유명한 지휘자들처럼 정우가 70대, 아니 50대 까지라도 삶을 이어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음반들에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한 최수민은 현재 여성 지휘자로 높은 인기를 누리며 정우가 남긴 프로 뮤지카 서울을 이끌고 있는 그 최수민 맞다. 최수민은 정우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8년부터 프로 무지카 서울 연주회에 단골 협주자로 무대에 올랐으며, 정우가 런던이나 로스 엔젤레스에 객원 지휘를 위해 떠날 때도 협주자로 데리고 가면서 국제 무대에도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이후 피바디 음악대학(존스 홉킨스 대학)에 진학하고 2000년 취리히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면서 디누의 후계자로 주목 받았다.
19. 디누 바이올린 협주곡 A 장조, 피아노 협주곡 E플랫 장조. 바이올린: 지네트, 피아노: 김소영, 프로 무지카 서울, 지휘: 최수민. 2005.
20. 디누 환상곡 ‘광주’, 환상곡 ‘모차르티아나’, 모차르트 작은별 변주곡에 추가한 32변주곡. 피아노: 필립 강. 2004.
21. 디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번 & 2번. 피아노: 김소영, 바이올린: 필립 강. 2004.
22. 디누 칸타타 ‘내일의 내일을 기다리며’, ‘광주 칸타타’, ‘베를린 칸타타’ 피아노: 김소영, 연주: 프로 무지카 서울, 광주시립합창단, 지휘: 최수민. 2005.
이 네 장의 음반들은 정우가 연주한 것도 지휘힌 것도 아니다. 여기수록된 곡들은 정우 자신의 작품들이다. 정우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을 무대에 자주 올린 편이었지만 음반을 남기지는 않았다. 이 음반들은 정우가 세상을 떠난 다음 제자와 친구들이 모여서 녹음한 것들이다.
정우는 불후의 명곡을 남기고자 했다. 정우의 작곡가로서의 정체성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항상 자신을 피아노도 치는 작곡가로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는 즈로 피아니스트, 지휘자로만 기억되고 있으니 야속한 일이다. 이 음반들이 녹음된 것도 정우가 세상을 떠난 다음의 일이었다.
하지만 정우는 작곡가로서도 꽤나 성공했다. 본인이 원하는 방식의성공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정우는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음악, 심지어 컴퓨터 게임 배경음악까지 작곡했다. 또 아직까지 널리 사용되는 전화 벨 음원, 유튜브에서 크리에이터에게 제공하는 배경 음악들 중에도 정우가 작곡한 것들이 꽤 많다. 그 중 듣고 나면 깜짝 놀라며 “아, 이게 디누 곡이었어?” 할 만큼 히트한 곡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우는 정치적으로는 좌파 평등주의자라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히 보수 귀족주의자라 이런 상업음악에서의 성공에 전혀 만족하지 않았다. 정우는 오직 클래식 작곡가로서의 성공을 꿈꾸었고, 그럴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연주자를 소개하자면 먼저 피아노를 연주한 김소영은 정우가 가장 아꼈고 심지어 그 재능을 시샘하기까지 했던 제자다. 1988년생으로 불과 13세이던 2001년에 정우 문하에 들어왔고, 2년만에 정우로부터 “이제 그만 하산하라.”는 판정을 받았다. 2003년에는 15세의 나이로 스승인 정우도, 선배인 최수민도 2위에 그쳤던 취리히 콩쿠르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자가 되었다.
어려운 가정 출신으로 정우가 모든 학비와 활동비를 후원해 주었다.그런데 정우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경력이 단절될 위기에 처했는데, 지네트가 후견인이 되어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2005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키가 웬만한 남자보다 크고 건장하여 소싯적 아르헤리치를 연상시키는 열정적이고 박력있는 연주를 들려줄 뿐 아니라 곡 해석 능력과 섬세한 감정표현에도 뛰어나다.
피아니스트와 바이올리니스트로 모두 등장하는 필립 강은 지네트가 입양한 아들이다. 서류상으로는 1986년생이며 지네트와 정우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지네트는 여기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피아노, 바이올린 두 분야에서 모두 세계적인 연주자로 성장하여 그 소문에 설득력이 점점 더하고 있다. 나도 그게 사실이라고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이 음반들에서 최수민이 모두 지휘자로 등장한다는 점이 이채롭다.정우가 생전에 피아노 협주자로 데리고 다녔다는 바로 그 제자 맞다. 최수민은 정우 뿐 아니라 유선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정우보다 유선이 더 좋아했다-, 로사, 마리가 큰 언니로 여겼다. 제자가 아니라 가족에 더 가까웠다. 1980년생으로 1997년 디누 마스터 클래스에 들어와 정우의 편파적인 사랑과 관심을 듬뿍 받았다.
1998년 루체른 콩쿠르에서 2위를 했고, 이후 명문 피바디 음악대학에 진학하여 피아노 뿐 아니라 지휘, 작곡, 비평까지 공부했다. 2000년에는 취리히 콩쿠르와 쇼팽 콩쿠르에서 모두 2위를 차지하였는데, 신세대 답게 “저는 콩라인.”이라고 당시 유행하던 말로 인터뷰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정우는 말년(?)에 얻은 제자 김소영의 재능을 최고로 쳤지만, ‘디누의 수제자’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는 이미 최수민에게 붙여진 상태였고, 최수민 역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003년 정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프로 무지카 서울과 디누 마스터 클래스가 좌초 위기에 처했을 때 유선의 선택은 그 부흥의 주역으로 최수민을 낙점하는 것이었다. 최수민은 여기 호응하여 지휘자 전향이라는 용감한 선택을 했다.
마케팅 측면에서 보자면 신의 한 수였다. 브랜드 그 자체나 다름없던 ‘디누’를 잃어버린 프로 무지카 서울과 디누 마스터 클래스를 ‘디누의 수제자’이자 세계 최연소 여성 지휘자가 지킨다는 감동적인 서사와 화제를 통해 기사회생 시켰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유선은 최수민에게 아낌없는 지지를 보내 주었다. 그런데여기에는 유선과 지네트의 묘한 신경전 같은 것도 있었다. 정우가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최수민과 김소영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 없다. 그런데 최수민은 정우와 유선이 함께 키운 제자나 다름없고, 김소영은 유선이 정우를 떠나 있던 시기에 키운 제자다. 아무래도 유선의 팔이 최수민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마치 최유선은 최수민을 지네트는 김소영을 디누의 후계자로 밀고 있는 이상한 그림이 그려지고 말았다.
어쨌든 이후 프로 무지카 서울은 제2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활발한 국내외 연주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고, 디누 마스터 클래스 역시 세계적인 음악 영재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저 때만 해도 20대 중반이었던 최수민은 지금은 40대에 접어들었는데, 나는 아직도 지휘자 최수민의 활약 보다는 피아니스트 최수민의 복귀를 더 바라고 있다.